"문명사적 소통"의 허구, 사대강 사업 (2)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작은 개울조차 아끼는 마음 없는 운하 개발

‘문명사적 소통’은 적절한 제목이 아니었다. 대운하라는 인위적 소통의 길을 뚫고자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장벽을 쌓는 아이러니를 칭송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문명사란 형용사를 붙이기에는 대운하 사업은 너무도 국지적인 프로젝트에 불과했다. 전체 국민의 마음이나 한반도의 역사에 면면히 스민 어떤 기운을 읽지 못한 처사였다. 권력자의 의지만으로, 전문가 집단의 비현실적 지원에 힘입어 추진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역사였다. 권력에 기생하는 숙주 같은 이들의 그럴듯한 예찬에 의지할 바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내 집 앞마당의 작은 뜰을 지키는 정성이 없으면 국토방위는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하다. 동네 길옆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아끼는 마음이 없으면 운하 개발은 억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땅덩어리에서 대운하 운운은 해상왕 장보고가 환생해도 웃을 일이었다. 한반도의 좁은 길을 따라 산골짝에서 남도의 끝자락까지 도로는 많고 철로도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남해가 태평양의 물을 동해와 서해로 이어주지 않는가! 필자는 한반도 대운하와 관련된 식자층의 논전이 우스웠고 민족의 현안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기보다 일종의 요설로 민중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소위 지성그룹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사대강(四大江)이 사대강(死大江)이 되기 전에 복원해야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맞아 내놓은 한반도 대운하 공약은 취임 후 벌어진 대규모 촛불시위에 부담을 느껴 흐지부지하다 해체되었다. 이 나라의 국가적 성형 수술이 중단되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허나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붓는 4대강 사업으로 탈바꿈하면서 이 나라에 예기치 않은 재앙이 들이닥쳤다. 2009년 공사를 착공하여 4년간 쏟아 부은 돈만 24조원에 육박한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4대강 사업을 2050년까지 유지할 경우는 총비용 31조 5백억 원에 편익(투입 효과)은 6조6천억 원이 되어 손해액만 24조 5천억 원에 이를 뿐 아니라 당초 목표한 홍수 예방은 제로로 드러났다.

4대 강을 살리겠다는 취지와 달리 4대강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지도자의 집착이 가져온 환경 파괴의 현실은 비참하다. 16개의 보(洑)를 세워 저장된 물을 내보는 식으로 관리하려 하지만 결국 보는 철거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원래 상태로의 복원도 희망이 있다. 지금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나라의 물길을 살리려면 용단을 내려야 한다. 4대 강 사업으로 인한 장점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이 지닌 원천적인 문제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토종 물고기들이 폐사하는 중에 멸종 위기종이 섞였는가 하면 문화재 훼손 피해가 잇따랐다. 녹조 현상, 제방 유실, 홍수 피해 등은 해마다 일어난다. 물줄기에 대한 성형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상상 외로 크고 값비싸다.

국토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자연환경을 망쳐버린 장본인들에게 논공행상을 벌인 지난 정부의 얄팍함에 치를 떨며 지도자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종북 좌파 척결이란 생뚱맞은 구호와 함께 찬성한 환경단체는 그 얼마며 1,152명의 훈·포상자들은 지금 어느 자리까지 올랐을까? 지시에 순종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항의 한 번 하지 못한 처사는 이해하기 힘들다. 서훈을 취소하거나 스스로 훈장과 포상을 반납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지금이라도 ‘4대강 살리기’가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4대강 복원’에 앞장서는 것이 도리다. 끝까지 반대하다 불이익을 당한 개인과 단체의 고초를 차제에 위로하는 바이다.

 

창조된 모습으로 자연이 아름다워

역사를 고치면 날조의 허물을 피할 수 없다. 국토를 뜯어고치면 자연 재앙에 할 말을 잃는다. 고교 시절 읽었던 18세기 초엽 영국의 수필가 조셉 에디슨(Joseph Addison)이 쓴 <태산과 두더지 집>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하루는 인간들의 대표가 신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자신들의 생김새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눈이 크다느니 작다느니, 목이 길다느니 짧다느니, 다리가 굵다느니 가늘다느니, 하는 한결같이 볼 멘 소리뿐이었다. 신은 그들에게 가장 불만스러운 신체 부위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인간들이 떼어다 버린 신체의 부위들로 금방 태산을 이루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무더기 속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잡도록 하였다. 자기가 원하던 부위를 챙긴 인간들은 만족하여 돌아갔다. 얼마 후에 인간들의 대표가 다시 신을 찾아왔다. 원상태로 복구시켜 달라는 탄원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새롭게 변신된 자신들의 모습에 만족해했지만 날이 갈수록 거울 속에 비친 자신들이 싫어지게 되었다. 그 모습은 본래의 자기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들은 신이 창조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더 이상 문명을 들먹이며 이 땅에 각종 기계들로 춤추지 않게 해야 한다. 개인도 나라도 제 모습이 가장 좋다. 우리 모두는 자신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를 지녔다. 되어야 할 자신으로서의 이상적 모습과 이미 되어 있는 현존재로서의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 할 때의 자신은 이상적 자아의 모습이다. 동시에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는 불만족이다. 나 자신이 되고 싶은 정체성의 정체(正體)는 진정한 나다. 우리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이상적 자아의 모습보다 낮고 현실에서 경험하는 내 자신보다 높은 어떤 단계에서의 나다.

<우신예찬>의 저자인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진정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말했다. 되고 싶은 자아의 상이라기보다는 되어야 할 자신의 상을 세우는 데서부터 행복은 시작된다. 되어야 할 자신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그러면서 변화를 경험하고 성숙한다. 조셉 에디슨의 우화는 외모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가장 우리 자신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어떤 특성과 태도, 다른 사람들과 뚜렷이 구별시켜주는 자신의 그 무엇을 달가워하지 않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느끼는 좋은 점들, 그것이 내게 없을 때 그것을 닮고 싶고 바꾸고 싶다는 감정을 지니기 싶다. 다른 사람의 특성이나 태도를 동경함이 지나쳐 자신의 부족한 점을 혐오하기에 이르면 이는 건강한 자아상을 이루는데 치명적이다.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인격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추구할만한 보편적인 인간의 내적 가치다. 이에 비해 개성이란 누구도 함께 공유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개성은 바뀌지 않는다. 인격이나 인품은 바뀔 수 있다. 어쩌면 가장 나다운 특질이 바로 개성이다. 한 나라의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인격에 속한다면 한 나라의 땅덩이나 역사는 개성에 속한다. 변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오만함이다. 그런 시도는 창조적인 변화가 아니라 역겨운 변질에 이른다.

‘우리 땅 이대로’ 자존감을 높이라

슈나이더의 글이다. “그대는 남의 손끝에서 놀기 위하여 태어난 것도, 군중의 일원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대는 그대만이 이룩할 수 있는 특유한 인간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대를 제쳐놓고 땅 위의 아무도 그대가 될 수 있는 그 인간은 될 수 없다.” 지극히 온당한 말이다. 귀뚜라미 소리에 반한 당나귀는 이슬만 먹다 굶어죽었다. 타인을 모방치 말라! 아이들은 누군가를 닮고 싶어 한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이 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돈나를 닮고 싶어 하고 인기 연예인을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특정 연예인의 사진을 수집하고 장신구를 따라 챙기고 헤어스타일에서 어투까지 흉내 낸다. 이를 “워나비 증후근”(wan-na-be syndrome)이라 부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생기면서 누군가를 무작정 닮고 싶어 하던 태도에도 변화를 보인다. 그만큼 현실 감각이 예리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의 책꽂이에는 전집으로 된 위인전이 한 두질 정도는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한 두 권쯤의 위인전은 있다. 어려서부터 위인이나 성인을 닮으려는 마음을 키움은 교육적으로 좋은 일이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확립하고 긍정하며 존중하는 습관을 기르는 일이다. 통계에 따르면 95%의 사람들이 내색하지 않아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한다. 자신은 하나님의 최선이다. 인생 최대 과업은 가장 나다운 자신이 되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닮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확신이요 자기를 긍정하는 태도며 자신에 대한 존중의 감정이다.

자신이 되지 않고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 부러울 수는 있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월등한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한 인간의 가치는 비교 불가다. 심지어 영적 차이도 인간가치의 계량기로서는 부적합하다. 존경할만한 위인을 닮고 싶어 함은 자연스러우나 워나비의 노예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가장 나일 때 아름답다. 먼 산을 바라보며 허깨비를 좇듯 허상을 좇아 자신을 연마하고 닦달한다면 값어치 있는 인생이라 보긴 어렵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이 가장 나답고 그런 나다운 자신을 기꺼워하는 것이 자존감이다. 우리의 땅에도 자존감이 있다. 그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땅을 아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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