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35)-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더감사교회/ 더감사운동본부/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필자의 아버지는 1917년생, 평택 임씨에 이름은 무지. 일제 강점기 태어나 1936년 결혼하였기에 대동아전쟁에 끌려가지 않았고 징용도 면했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 철이 들기 전에 고향(경기만의 영흥도)을 떠나 육지(인천)에 나와서 해외(?) 유학을 시작했다. 그 모두가 아버지(어머니)의 결정이었다. 무학자인 부모님이 그런 결정을 한 것은 가히 혁신(革新, innovation)이었다. 물론 시집간 큰누님이 인천에 이사하면서 생겨난 일이며 나에게 주어진 변화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2학년까지 공부한 3년 6개월 동안은 엄청난 시련과 훈련기였다. 도회지 환경에 대한 적응, 특히 매일같이 치러야 하는 시험은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는 문제들, 과제와 준비물 등등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딸을 다섯이나 둔 큰누님이 동생까지 돌봐 줄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감사한다. 나를 놀라운 세계로 인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아버님의 병환으로 나는 본의 아니게 휴학을 하게 되었다. 잠시 부모님과 함께한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으니 말없는 고통이 있었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아버지(어머니)와 함께했다. 아버지의 농사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논갈이 쟁기질을 시작으로 모내기철이면 농군도 힘들어하는 써레질까지 해야 했다. 이 시기, 나는 우리나라 재래식 농사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아버지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었음을 감사한다.

이때에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누게 되었다. 아버지는 천성이 농사꾼이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족하였다. 가끔씩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는 것은 반찬을 마련하는 부업 일뿐이다. 그는 내게 초등학교의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도 소몰이하며 귀가하던 길에서 한번 피력했을 뿐이다. 워낙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지 않았다. 다만 일을 할 뿐이었다. 겨울철엔 사랑방에 앉아 늘 새끼를 꼬았다. 겨우살이 나뭇단을 묶을 새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0월 예비고사를 1개월 남긴 어느 날 세상을 뜨셨다. 바닷가에 나갔다가 비를 맞고 온 뒤 식사한 것이 급체하여 한 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스러져갔다. 그리고 나는 41년이 지나는 시점에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교사가 되기를 말씀하신 것은 내게 큰 유언과 같은 말씀이신데 난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 두 분이 우리 집에서 하숙을 오랫동안 하셨다. 아버님은 그들을 보고 난 뒤의 일일 터.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아버님은 교사를 원하셨는데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다? 그렇지, 교사(敎師)가 일반 ‘공교육의 선생님’이라면 목사(牧師)는 기독교 신자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지도하고 예배를 집전하며 사람됨을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아버님은 말없이 농사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날그날의 해야 할 일은 내게 넌지시 말씀하신다. 내일은 윗배 미 논 두 마지기를 갈고 논둑을 정돈한다고 예고하셨다. 그리고는 논에 이미 날라다 놓은 두엄을 펴는 작업이 내 일임을 알려주신다. 아버님과 그렇게 함께 한 일 년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간이 되어주었다. 아버지의 성품과 인격, 그리고 그의 풍류(風流)를 이해하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이슬 머금은 논밭을 돌고 들어와서는 소와 돼지가 먹을 여물을 쑤는(불을 때어 삶음) 시간이면 꼭 약주 한잔을 드신다. 망둥이나 숭어 말린 것을 지피던 아궁이 불에 살짝 구어 안주를 삼는다. 흥이 나면 늘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다. 장례식에서 상여꾼의 큰북 재비는 늘 아버지 몫이다. 40대 초반에 당뇨(소갈증)에 걸린 뒤 아버님은 매해 야위어갔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예수를 믿기 시작했지만 신실한 믿음 생활은 하지 못하였다. 캄캄한 밤 자다가 일어나 기도하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본 기억이 유일하게 한번 있을 뿐이다. 그렇다. 아버님과 함께했던 그 일 년이 내겐 매우 귀중한 자산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다.

아버지는 많은 것을 자녀들로부터 듣고 싶어 했고 대화하고 싶어 했다. 저녁 식사하는 시간이면 일상적인 문안과 그날의 이야기, 그리고 어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이웃에게 들은 것마저도 지혜라 생각되는 이야기들은 듣고 싶어 하였다. 그렇게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형님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70년대 초 경운기는 농촌 기계화의 첨병이었고 돈벌이의 수단이기도 했다. 형님이 농협자금을 빌려 경운기를 구입하였다. 다니던 철도청에 사표를 내고는 기계화영농을 꿈꾸며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논이며 밭이며 경운기를 움직이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경지정리가 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품앗이를 다니고, 배 터에 나가 손님들을 태워오며 돈벌이를 하는 것이 형의 일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그날그날 형님으로부터 집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듣기 원하였다. 하지만 형님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하는 일이 늘 고단하기도 하였으나 형님은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답답하다고 내게 토로하곤 하였다. 나는 15살, 어린나이였으나 재잘거리며 아버지의 장단에 맞추어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중학생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한 일 년은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시간이요 감사한 시간이었다.

아버님께서 내가 목사가 되어 감사운동을 하는 것을 아신다면 자랑스러워 할 것만 같다.

필자의 아내, 그녀에겐 무뚝뚝한 아버지가 계시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창이 고향이며 서울의 명문 공과대학 출신이다. 경상도 분인 탓에 자상함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삶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늘 멀게 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는 아버지가 늘 곁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구원투수 같은 느낌이랄까? 아버지의 따뜻함과 사랑을 몸소 느끼게 된 것이다. 어린 초등학교 시절 가을운동회 때면 어느새 운동장 저편 미루나무 곁에서 아버지가 서 계신다. 소풍 갈 때는 떠나는 교문 한쪽에서 손을 흔들어주신다. 부모 참관 수업에서도 맨 뒤편 한쪽 구석에 아버지는 언제나 계셨다. 그리고는 수업이 끝나면 지폐 한 장을 그녀의 손에 살짝 쥐어주었다. 아버지는 말없는 든든한 힘이요 배경이었다.

헌데, 요즘 그 아버님이 많이 아프시다. 점점 나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대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어느 땐 기억력이 무디어지고, 어느 땐 말씀이 순조롭지 못하며, 때때로 대소변을 실례하기도 한다. 안타깝다. 어느 땐 하신 말씀을 자꾸 반복하신다.

오늘을 생각하면 감사하기 어렵다. 현실이 감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오늘의 아버지와 어제의 아버지가 한분인 것을.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지? 벌써 손녀딸을 둘이나 두었지만 얼마 후엔 나도 아버지 같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아니다. 곧 닥칠 나의 미래의 모습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말없는 공감과 지지는 나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있어온 힘이다. 잊을 수가 없다.’고 말이다.

만약 아버지의 빈자리가 생긴다면 그녀는 많이도 울 것만 같다. ‘그때가 오기 전에 감사하며 섬겨야지? 같이 살지도 못하며 섬긴다는 것은 같이 사는 가족의 수고에 십 분의 일이나 될는지. 그렇지만 감사해야지? 아버지로 인하여 늘 감사할 거야. 아버지가 살아있음에 감사할 거야.’ 곁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힘인 것을. 공감이 되고 소통이 되면 감사에 성공한 것이다. 감사는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힘을 부어주는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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