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가고 싶은 설레는 교회가 되려면?

 

이대희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를 역임했다, 신학교, 학술원, 목회자, 교회교육등 세미나와 강의를 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진행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 쉬운 기독교이해> <전도가 안 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을 담당했으며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과 연구를 토대로 200여권의 이야기대화식 성경교재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50여권의 저서 “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문체부 세종도서).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하브루타 연구소장. 미국 Kernel University Korea Campus 국제 객원교수로 있다.

 

폴란드의 노바후타는 ‘신도시'라는 뜻으로 1950년대에 완공된 공산주의자들의 이상을 실현한 기념비적인 곳이었다. 이 도시는 폴란드 건설의 주역이 될 노동자들의 중심지로 계획되었다. 하루는 노동자들이 예배를 드릴 공간을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나무 두 개를 연결하여 십자가를 만들고 그것을 땅위에 세웠다. 여기가 앞으로 세울 예배 장소라고 표시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배당을 원했고 그곳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찬송도 부르고 친교도 나누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그것을 불법 집회로 해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또 모였고 정부는 해산하기를 수년 동안 반복되었다. 십자가를 없애는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수없이 당하면서 당시 폴란드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집회를 계속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다. “교회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중에 함께 거하는 주님을 높이는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1960년 폴란드 노바후타 광장에서의 시위

노바후타의 광장에 십자가를 세우는 폴란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30년 후 공산주의의 심장부인 소련에서 비슷하게 반복됐다. 1990년의 노동절. 장소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이었다. 정교회 두 신부가 2.5미터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세우며 성도들과 행진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후 세계가 놀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고르바쵸프에 의해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가 된 일이다.

과연 그 몇 달 기간에 무슨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당당하게 외치며 십자가를 따르는 무리들의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이것은 길거리 교회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행진한 광야교회였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이동하는 사람 공동체 교회가 진정한 교회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오해하는 것은 중에 하나는 건물이 곧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의식 속에 교회는 건물이라고 생각하게 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이 크다. 보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 의하여 교회도 결국 자기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다. 보여야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상적인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오히려 그런 하나님이기에 우리에게 믿음이 가치가 있고 영원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 나타나지 않으면 교회 역시 존재가 힘들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것은 신앙이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보여야 교회라고 생각하다 보니 움직일 수 없는 한 곳에 우뚝 세운 큰 예배당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의 가치(?)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바알 우상을 숭배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보이는 건물로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건물이 아닌 바로 우리라고 당당하게 선포해야 함에도 그것이 힘들다. 그리고 한 번쯤은 예배 장소를 떠나 길에서 혹은 들판 같은 곳에서 산상수훈과 같은 예배를 드려 보는 것도 진정한 교회를 그리는데 한몫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온성도가 한 번쯤 생각할 수 있다.

 

초대교회 성도인 스데반이 이해한 교회 본질의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을 되새김질하게 한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4-48)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예배하고 기도하러 가는 장소가 교회가 아니라 예배하고 기도하는 당신이 바로 교회인 것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 건물을 따라 이리저리 교회를 찾아다닌다. 자기가 곧 교회인 줄은 모른 채 말이다.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된 것이지 벽돌이나 나무로 된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는 아니다.

최근에 한 지인이 가족식탁에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그날이 기다려지고 무척 설렌다. 왜 그럴까? 그 집이 얼마나 큰 집인가 보다 그 가족과 만남의 시간이 설레는 것 아닌가? 교회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모인 거룩한 성도들과 만남과 교제하게 하시는 성령님이 기다려지고 말씀 안에서 나누는 성도의 교제가 설레는 것 아닐까? 만약 이 설렘이 없이 교회 마당만 밟고 온다면... 이렇게 수년 동안 반복했다면 지금이라도 한 몸 된 사람 교회, 만남을 기대하며 가고 싶은 설레는 교회로 함께 리뉴얼해보면 어떨까?

 

▶나의 리뉴얼 하기

-내가 곧 교회라면 우리는 어떻게 교회를 생각해야 하는가? 예배당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함께 한 성도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할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이며 오늘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나는 누구이며 함께 모인 우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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