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목사] 평화통일(平和統一)과 이상국가(理想國家)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정과 반정 그리고 편당으로 기울어진 조국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나라를 잃었을 때 2천만 겨레가 땅을 치며 하늘을 원망했다. 삼발이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력 균형은 신라의 통일로 마감되고 천년 신라가 끝난 후 고려를 거쳐 다시 500년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피로 얼룩진 고려 말과 조선 건국, 폭정과 반정의 조선 중기, 그리고 가쁜 숨을 내쉬던 조선 말기는 그 이전부터 배신의 씨를 잉태했던 당쟁까닭에 국력을 감퇴시켰다. 사색으로 나뉜 편당들이 조국을 경시했고 구한말의 미국과 유럽 열강,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던 러시아와 청과 일본의 등쌀에 줄타기를 하던 이 가여운 민족은 날강도 일제에게 민족혼을 빼앗겼다.

개국이다, 쇄국이다 갑론을박하며 친러와 친청과 친일의 눈치 보기로 나라의 명맥을 겨우 잇고 있을 때 힘없는 민중은 망연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지도자 복이 지지리도 없던 곤궁한 민중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했다. 민영환 선생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여 대한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강산도 울고 하늘도 울었다. 그가 자결한 뒤 8개월 만인 1906년 7월 7일 <황성신문> 논설에는 “아! 민영환은 죽었으나, 우리 조선은 죽지 않았다. 우리 조선이 죽지 않는 한, 민영환도 죽지 않는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렇게 기사회생한 이 나라 이 민족인데 벼랑 끝의 위기에서 흔들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 버리려는 자 찾아보기 어렵다. 목숨은커녕 가슴 두드리는 통분조차 없다.

비둘기가 매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독수리의 발톱을 지켜야

서로 물고 찢으면 함께 망한다. 남과 북이 전갈과 전갈, 이리와 이리가 되어 싸우는 동안 민족의 얼이란 것은 실타래처럼 엉킨다. 통일이 되면 풀릴 매듭들이지만 첨예한 대립이 증폭되면 될수록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남과 북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여지를 확보하고 다툴 수 있는 영역을 더불어 획정하면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앞지르고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을 능가한다. 조국애나 민족애, 정신력의 강도처럼 상대적 비교 자체가 어려운 측면을 고려한다면 국력 면에서 서로는 엇비슷하다. 두 나라가 보이는 긴장감은 강대국들조차 숨죽여할 만큼 막강하다.

한반도에 어떤 조짐이 보인다면 세계가 떠들썩하게 될 것이다. 팽팽하면 오히려 위험하다. 부풀기를 계속하던 두 풍선이 적당히 팽팽함에서 멈추지 않으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이 있고 러시아와 일본이 주시한다. 현실적으로 북한은 매파가 강하고 남한은 비둘기파가 강하다. 비둘기가 매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독수리의 발톱이 제거되지 않게 해야 한다. 남한은 유연한 자세와 함께 독수리의 기상을 지녀야 한다. 적을 타격섬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강 능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죽어서 꽃필 충혼의 조국애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선택 받은 민족과 불요불굴의 정신

조국이란 죽어서라도 지킬 민족혼이다. 조국이란 이름 밑에 민족의 얼이 꿈틀대고 민족의 정기가 모인다. 조국을 빼앗겼다 찾은 민족들에겐 굴욕과 영광의 느낌이 남다르다. 잃었다 찾은 동전 몇 개도 기쁘고 강탈당했던 농지를 되찾은 기쁨도 큰데 하물며 나라를 빼앗겼다 다시 찾은 감격에 비할까? 압살 직전에서 회생되어 이만큼 견결함을 지켜온 민족이 어디 있던가? 한민족은 끈질기고 강하다. 역사상 대제국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기에 몇 쪽의 기념비적 언급만 남겼으나 내 조국은 다르다. 5천년을 이어온 역사의 숨결, 존립 의지, 민족의 저력은 불요불굴이다. 지리멸렬하지 않으려면 살아서 지켜내려는 조국애를 꽃피워야 한다.

이스라엘이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세계의 천덕꾸러기로 이리저리 뒹굴고 있을 때 그들의 건국을 예견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선민사상이라면 로마도, 헬라도, 독일도, 일본도, 중국도 지니고 있었다. 2천년 동안 마치 골짜기에 나뒹굴던 뼈다귀와 다를 바 없던 이스라엘이 소생하였다. 왜였을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인간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민족 역시 인류 역사의 황혼기에 시대적 사명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고 믿는다. 값싼 민족주의가 아니라 ‘조선’(CHOSEN) 민족은 하나님께 ‘선택된’(chosen) 민족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 때문이다. 전쟁의 위협이 목전에서 아른거리고 패망의 위기가 일촉즉발이어도 주님의 교회가 영원하듯 조국은 영원하리라!

 

한반도의 비핵화는 과연 한반도의 안전을 말하는가?

한 때 정권을 잡았던 어느 통치자의 핵무장 포기선언을 자주권의 상실로 평가함은 역사의 준엄함이다. 북한이 천신만고 끝에 핵을 개발하여 핵무기로 한국을 위협하는 현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북한은 이미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남한과 미국을 위시한 주변 강대국들과 협상중이다. 한국에서 영구 폐기되었던 연료봉은 전혀 회복이 불가능한 것인가? 남한 독자의 핵개발론이 불거져 나왔지만 현실적인 시도에는 걸림돌이 많다. 뿔뿔이 헤어졌던 핵과학자들을 불러 모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강대국의 감시망을 피하기도 어렵다. 미국이 핵우산으로 받쳐주는 한에서 한반도가 안전하지만 이 우산을 어떤 이유에서건 접을 경우엔 한국으로서는 아무런 카드도 없다.

핵 폐기 운운하는 이 시점에서 핵개발을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추진할 필요는 과연 없을까? 현재 남북한 전략의 비대칭 상태에서는 일방적 윽박지름과 답답한 소극적 대응이 있을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남북한이 동시에 핵을 지니면 현재보다 더 안전하다. 공멸의 불기둥보다 공존의 연기기둥이 솟아오를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시샘과 군비경쟁의 도미노현상도 간과할 수 없지만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에서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주변국이 아닌 내 나라다.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도 없으리라. 하지만 저들이 주장하고 남한이 지지하는 ‘한반도의 비핵화’란 북한의 완전 비핵화를 의미함이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비핵화 곧 미국의 핵 관련 시설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 한반도 비핵화는 고도의 기만전술이다. 미국의 핵 관련 시설이 제거될 시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의 평화통일(平和統一)과 그 분의 이상국가(理想國家)

불안정한 형세를 틈타 어느 쪽이건 ‘난’(亂)이라도 일어난다면 정말 난리다. 최근에 불거진 기무사 계엄 문건 사태는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은 <이상국>에서 철학자가 왕이 되어 민중을 통치하는 나라를 꿈꿨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계급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낙원으로 보았다. 이 나라에는 독점이 없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지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고기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식사 후에는 비평에 종사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입다는 깡패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가 되었다. 고려 말엽 무신정권시대 때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은 “왕후장상에 어디 씨가 있더냐?”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왕까지 꿈꾸었는지 알 길 없지만 미완의 ‘난’(亂)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났다. 쿠데타는 전형적인 ‘난’이다. 어떤 경우에도 남과 북에서 ‘난’을 통한 나라 바로잡기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난’이란 성공하면 건국신화가 꽃피고 실패하면 민화로 남는다. 요순시대를 태평성대로 이끌었던 우 임금은 “바람에 머리를 감고 빗물에 목욕하면서”(櫛風沐雨) 일하는 부지런함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누가 통치자가 되건 하늘을 감동시켜야 백성이 감동한다. 양이 왕이 되는 이상(理想-異常)한 나라가 있다. 메시아왕국이다. 어린양 그리스도가 만국을 다스릴 통치자로 세워진다. 도덕과 윤리가 완성되고 종교 정신이 통합되어 사랑과 공의를 법이 아닌 삶으로 실천한다. 하늘이 세워 땅에 세워질 이상국이다. 겨레의 염원에 그려진 평화통일은 결단코 전쟁이나 ‘난’을 통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의 주관자이신 그분께서 마련해주실 이상국이어야 한다.

 

싸우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누가 피해자인가?

통일의 길이 요원하다면 공생공영의 길은 없을까? 전쟁만이 통일의 외길이라면 이 민족은 또 한 번 살육과 폐허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언제나 희생당하는 것은 약자다. 싸움을 걸려는 자는 싸울 준비를 끝냈고 싸움을 피하려는 자는 오리무중이다. 죽기까지 싸울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아예 싸울 뜻이 없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념 논쟁에서 다수의 국민은 소수자의 전횡에 휘둘림을 당해왔다. 전쟁은 불바다를 이루고 피바다로 이어진다. 죽어나갈 것은 이념적 패배자나 전쟁포로만이 아니다. 무수한 생명이 죽고 종전이 되어도 학살극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월남이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에게 패하자 사상 개조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백만 이상의 보트피플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적화통일이면 피의 숙청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신 차리자!

이 시대의 안중근은 누구인가? 민족의 안녕과 동북아, 나아가 세계평화에 위협을 가하는 오늘의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구를 겨눌 자는 누군가?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 날조된 신학 이론으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말쟁이가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의 신학자가 있다면 본회퍼의 길을 따를 것이다. 주님은 제자 한 사람을 열심당이었던 시카리(Sicarii)에서 고르셨다. 동족의 목숨을 볼모로 하여 윽박지르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면 그가 누구이든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한반도에 불어 닥친 때 아닌 온난 현상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지만 긴장의 끈을 붙든 손만은 가볍지 않다. 북미 관계에 따라 기압골이 형성되어 그때마다 한반도의 정치기상도를 살펴야 하는 대중의 마음은 그래서 무겁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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