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애향원 등 한센병환자들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

소록도, 애향원 등 한센병환자들의 아버지

1966년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10만여 명이 운집하여 치러진 오방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 장례식은 전라남도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전남사회장이었다. 이 자리에는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온 결핵환자, 여수와 나주에서 등지에서 올라 온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와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며 오열하였다고 한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1880년 광주시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를 가슴에 품고 한센병ㆍ결핵 환자들과 걸인의 아버지가 된 사연이 있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광주 양림리(지금의 양림동, 탐진 최씨 집성촌)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와 오웬(Clement C. Owenㆍ한국명 오원)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예수를 영접한였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는 생업을 위해 일시 전남 경무청에 순검으로 취직했다가 그만 둔 뒤 1907년 창설 된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에서 윌슨 선교사를 도왔다. 

1909년 4월 3일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선교사가 급성 폐렴으로 죽어가는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올라오는데, 유진 벨 선교사의 부탁으로 최흥종은 영산포 나루터에 마중을 나갔었다. 그가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서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효천 근처의 산자락에 피와 고름으로 얼룩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한센병 환자(문둥병자, 나병환자)를 만났다. 그때 포사이드 선교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자를 자기가 타고오던 말에 태우고 자신의 털외투마저 벗어 입힌 채 광주 양림동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았었고, 그 일생 동안 신앙의 나침반이 되었다. 같은 민족이었던 사람들도 혹시라도 자기가 감염될까봐 돌맹이 던지고 멸시하던 한센병 환자를 마치 자식처럼 대해 주는 것을 보고 “아, 그래 저것이 바로 예수교의 힘, 바로 예수의 사랑이다. 예수를 믿으려면 저 의사분처럼 믿어야 될 것이야” 라는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포사이드 선교사와의 만남은 평생 그를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오웬 선교사의 장례식을 보고 다시 목포로 돌아갔고, 그가 구해준 한센병 여인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양림동 선교사가 문둥병자를 데려다 치료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양림동은 밀려드는 한센병 환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최흥종은 봉선리에 있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기증하여 나환자 진료소를 설립하였다.

1912년, 광주시 효천면 봉선리에 한국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이 개원하게 된 배경인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와의 숙명적 만남을 통해 가슴이 뜨거운 교인이 된 최흥종은 1912년 광주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예장통합) 초대 장로가 되고, 1914년 9월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에는 북문밖처소( 나중에 광주중앙교회로 설립)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하면서도 광주나병원 일에 더욱 열심이었다.

오방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광주중앙교회, 철거되기 전의 마지막 모습

당시 광주나병원을 방문했던 '기독신보' 기자는 "병원을 주관하는 의사는 윌슨(Robert M. Wilson)씨요, 조선 형제로 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시키는 이는 최장로 흥종씨다"고 쓸 정도였다. 광주나병원은 이후 환자가 늘어나면서 '봉선리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거센 항의를 받는다. 1926년 광주나병원이 여수 애양원으로 병원이 옮겨진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었다.

1932년, 오방 최흥종 목사는 김병로, 송진우,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한 후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다 죽어가는 나환자들의 치료와 생계문제를 위한 대책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오방과 함께 한세병 환자들이 처음 광주를 출발할 때는 150명 정도였던 것이 소문을 듣고 전국 환자들이 따라 나서면서 열하루 만에 서울에 도착할 때에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총독부까지 쳐들어간 최흥종 목사는 우가끼(宇垣) 총독과 면담하여 소록도를 나병환자 수용시설로 할 것을 약속받았다. 날씨가 따뜻한 전남 고흥군 해안가에 있는 소록도는 천예의 섬으로 당시에는 일본군 휴양소로 활용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총독으로부터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갱생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환자 광화문 행진'이었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1935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의 친구에게 부탁해 거세를 하고는 아호를 오방(五放)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에게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돌렸다. 오방이란 '다섯가지를 놓아 버린다'는 의미로 집착을 떨어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가 놓아버린 다섯 가지란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 들어가 오방정(五放亭)에 은거한다. 그가 거처하던 오방정은 이후 1946년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남종화가 의재 허백련의 작업 공간인 춘설헌(春雪軒)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방정은 1930년대 2.8독립선언서의 핵심 인물인 언론인 최원순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은거한 석아정(石啞亭)이었다.

광주 무등산 우거에 찾아온 함석헌 선생과 전남대 학생대표들...1962년 4.19기념 강연차 전남대 방문한 함선생이 하루 먼저 광주에 와서 오방을 찾아 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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