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0~12]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경기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4개월만에 고교과정을 통과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차석으로 입학,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석사과정 없이 박사 과정을 6개월 만에 통과, 24살에 플로리다 대 최연소 교수가 되어 학생들보다 나이가 “어린 꼬마 교수”로 불린 분이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최고권위의 상징인 한림원 회원과 국제 원자력상 수상했고, 국제원자력기구 의장과 과학기술처장관을 2번이나 지냈지만 ‘복음의 대사’가 된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기며 살고 있는 그 분은 바로 정근모 박사입니다. 

그는 신부전증으로 고통 당하는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해 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아들의 병간호에 지친 그에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네 아들에게 감사한 적이 있느냐?” 

정 박사는 하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아들에게 감사하라니요?” 

“네 아들이 아니었다면 네가 나를 향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겠느냐?”

정 박사는 그때 거듭남을 체험했고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깊은 사랑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 재물, 명예를 가졌지만 영혼이 갈급한 사람들과 자녀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되길 간절히 원했고,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이 땅의 부모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하는 크리스천들을 향해 잠언 같은 목소리를 그의 책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찬이고 싶다”에서 들려주었습니다. 다음은 이 책을 통해 고백한 그의 간증 내용 일부입니다. ..................................................................

미국에 있는 아들 진후가 신장기능 상실로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나와 아내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보 기도합시다.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진후를 위해서.” 

아내와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이런 태도를 본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과학자가.. 그것도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아들의 입원 소식을 듣고서 한다는 게 고작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이란 말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에게서 그런 대답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온 세상을 원격 조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은 과학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간섭하시고 다스려 왔습니다. 아울러 그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을 지키기 위해 검은 파도 속에서 제방이 되기를 자처하신 분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깨달음이 결코 내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과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한결같이 감격의 신앙 고백이 흘러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상대성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제한된 진리로 만든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입에서도 “과학을 모르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불구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러했듯, 과학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위대한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란 이 세상 진리가 갖고 있는 극히 한정된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 동안 과학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과학을 알아 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에도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비단 학문적인 부분에만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서도 하나님의 따스한 입김은 나와 내 가정을 감싸 주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따라 진후의 병세는 차츰 호전되어 갔습니다. 투석을 하고 몸 속에 퍼져 있던 요산이 제거됨으로써 혈압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긋지긋하던 통증으로부터 진후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이 검푸른 태평양을 건너 달려왔습니다. 우리 부부의 입에서는 감동에 겨운 한 줄 고백이 흘러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크고 오묘해서 우리의 눈과 귀와 머리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통해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의 터널 안에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곳에서 빛으로 가장 아름답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 

[이사야 28:29]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전도서 7:13~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과 하늘의 영광과 그 복락은 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학위들을 받았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BA학위, 즉 Born Again 학위를 못 받으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있게 거듭났다라고 말할 수 있으신가요? 나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깨달아집니다. 나 대신 죄값을 치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집니다. 보잘것없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깨닫게 됩니다.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지었던 반복적 습관적 죄로부터 멀어집니다. 주님 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되는데 앞장 섭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함이 일어납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성령이 임하시고, 그 성령의 교통함 속에서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내 삶의 주인 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새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인식하고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인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얼어붙었던 땅과 매말랐던 가지마다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여러분 모두 주님이 알려주신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고 새롭게 거듭남으로 주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기쁘게 사시길 기도합니다. 

♣나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거듭남을 살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대속의 은총만이 저를 거듭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거듭난 자로써 이웃을 내가 먼저 더 사랑하고 내가 먼저 더 용서하고 내가 먼저 다가가길 소망하오니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로뎀나무 아래로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9: 4~ 8]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 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쉬어 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 날을 갈았다네."

도끼날이 무디어 지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덮어놓고 열심히만 한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더 많은 열매를 위해서 멈춤이 필요하고 시간을 내서 쉬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갑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바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현실이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남보다 더 빨리 성공해야 인정받는 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마음이 바쁘면 몸도 자연스럽게 바빠지고 생활도 바쁘게 됩니다. 조급증은 결국 영혼까지 병들게하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바쁘다'는 말의 한자는 '바쁠 망'(忙)자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조급하다,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원래 '마음 심'(心)자에 '망할 망'(亡)자가 더해져 마음이 바쁘면 망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하여 쉼을 뜻하는 한자는 '쉴 휴'(休)자인데 이는 '사람 인'(人)자에 '나무 목'(木)자가 더해짐으로써 휴가(休暇)라는 말은 사람이 나무가 우거진 한적한 곳에서 느긋하게 (暇,겨를 가) 지내는 것을 뜻합니다. 

선지자 엘리야에게도 쉼이 필요했습니다. 위대한 능력자의 선지자였던 그가 기도했을 때 3년6개월 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가 내렸고,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응답이 없던 재단에 불이 내렸습니다. 승리감에 자신만만해야 할 그가 이세벨이 군사를 동원해 위협하며 자신을 잡아 공개적으로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바라보지 못하고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 능력의 사람조차도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두려워하고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 죽기를 구했습니다. 혼자서 싸우기 너무 힘들었고 지쳐있었기에 이세벨이 위협하는 말 한마디에 사명도 잊고 목표도 무너져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이 낙심 중에 넘어진 도망자를 위하여 광야 한가운데서 로뎀나무 한 그루와 구운 떡과 물병을 예비하셨고, 그 그늘 밑에서 어루만져 주시고 그를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낙심과 절망으로 주저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낙망한 엘리야를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엘리야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영육의 피곤함으로 죽기를 원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떡과 물을 주시고 또한 누워 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육이 피곤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나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위기에 직면할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아.. 다시 일어나라. 힘을 내라. 내가 도와주마. 내가 네 오른손을 잡아주마. 어찌하여 거기에 있느냐.. ” 

로뎀나무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에서 볼 수 있는 약 1~ 2 미터 크기의 콩과의 관목입니다. 로뎀나무는 주님의 십자가를, 그 그늘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로뎀나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답답한 한숨과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부족을 용납하십니다.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아시고 우리의 그늘이 되셔서 우리의 눈빛을 살피십니다. 우리의 눈빛이 주님의 눈빛과 마주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뎀나무 아래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 체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해도 그래서 또 실패하고 낙심할 때에도 주님은 나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어루만짐은 힘내라는 위로와 격려요, 함께 하시고, 두려워 말라는 사랑의 만져주심입니다. 은혜의 로뎀나무 그늘 아래에서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의 어루만져 주심을 맛보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떡과 성령의 생수로 먹고 마시어 다시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쉼은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쉼이 아닙니다. 로뎀나무이신 예수님의 날개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보호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이 만드신 양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쉼을 얻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어떤 이는 술로, 어떤 이는 도박으로, 어떤 이는 쾌락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의 기쁨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없음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험합니다. 진정한 평안과 안식은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계속되는 찜통 더위, 역대 최고기온을 경신하는 폭염으로 지치고 피곤한 요즘, 진정한 쉼과 휴식을 통해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 참평안과 참 충전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쉼표의 비밀

하나님은 가끔 쉼표를 찍어 
우리를 멈추게 하십니다.

실패와 실수를 통해 쉬게 하시고, 
질병을 통해 쉬게 하시며,
실망을 통해서도 쉬게 하십니다. 

역경과 시련을 통해 쉬게 하시고,
갈등과 장애물을 통해 쉬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 특별히 사명자로서의 인생은 
아주 긴 여행입니다.
잠시 쉴 수 있습니다. 

때론 끝났다는 듯이
오래 멈추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멈추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우리가 먼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됩니다.

잠시 멈춤은 재충전의 시작입니다.
그 쉼표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나를 돌아보게 하시며,
겉모습의 내가 아닌 
속모습의 진짜 자기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나를 새롭게 하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가,
요셉의 감옥생활이,
엘리야의 로뎀나무 아래가,
요나의 물고기 뱃속이,
다윗의 쫓기는 시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와 실패로 보여지는 시간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쉼표의 시간이었습니다.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제 2부가 멋지게 펼쳐 질 것 입니다.

♣나의 생명이요 피난처요 힘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삶의 짐이 무거워 허우적거릴 때 사랑스런 눈길로 손 내미시는 주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비틀거릴 때 조용히 다가와 대신 지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로뎀나무이신 예수님 아래서 주님이 부어주시는 참 쉼과 평안과 위로와 은혜와 힘과 소망으로 오늘도 힘차게 날아오르게 하소서. 인생의 어떤 위기에서도 늘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윤남철 목사(평강중앙교회. 삼산노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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