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전 총신대 설교학 교수)

십수 년 전 프랑스를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들른 곳이 반 고흐의 무덤가였습니다. 프랑스 하면 대부분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이 먼저 떠오를 것이고 저 같은 목사에게는 종교개혁의 불꽃인 존 칼빈의 고향 루아용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파리 북쪽 30km 정도 떨어진 도시 오베르, 고흐가 생애 마지막 70일 동안 머물렀던 방과 그의 무덤가였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원에서 영시를 공부한 후에 신학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목회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30살이 되면 평생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젊은 날 3년은 주님처럼 오직 복음전파와 사랑실천을 위해 치열하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는 영시가 지상의 기쁨을 선물했다면 성경은 하늘의 감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깊이 할수록 말씀에 대한 감격보다 분석하고 비판하는 학문적 흐름에 제 신앙마저 흔들릴 위기가 있었습니다. 신학대학원 2학년이 되었을 때 신학 공부를 계속 해야 하는가 중단해야 하는가를 놓고 고민할 때 저에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고흐가 쓴 편지글의 한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평생 딱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던 무명의 화가 고흐는 그림을 향해 전 인생을 불태운 사람입니다. 청년기에는 네덜란드 개혁파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가 되기 위해 벨기에의 가난한 탄광촌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돌보기도 했습니다. 1880년이 되었을 때 고흐는 목회자의 꿈을 접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꿈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평생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호의 지극한 재정 후원 때문이었습니다. 극심한 정신장애와 빈곤 속에서도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평생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들을 남겼습니다.

평생 고흐는 테호와 700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어느 날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제목의 책에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과 그가 만드신 세상을 캔버스에 담으려는 몸부림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편지글을 정신없이 읽다가 한 구절에서 심장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신학 공부를 두고 고심하던 저에게 그 한 마디는 번개처럼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즉시로 글을 바꾸어 기록했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학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학문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날로 신학함에 대한 모든 고민을 접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심정으로 신학의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세상 속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이 그를 두려워한다.”

류응렬 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 전 총신대 설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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