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4 박홍섭 목사

죄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20).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얻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행함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행함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행함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입니다.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그렇다면 믿음의 행위가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하는 영역이 어디일까요? 말입니다. 야고보서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것도 말인데 야고보가 각 장마다 말에 대한 경고와 교훈을 반복하는 이유도 변화된 말이 구원받은 성도의 가장 구체적인 행함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1:19절에서는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했고, 1:26절은 자기 혀를 재갈물리는 자가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

2장에 오면 2:1-4절은 악한 말로 형제를 판단하는 것을 비판했었고, 12절에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라고 한 뒤, 14-26절에서는 구원 얻지 못하는 가짜 믿음을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과 연관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3장에 오면 3:1-2절에서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가급적이면 말을 많이 하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3:3-12절에서는 말의 긍정적 영향력, 부정적 영향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영향력이 큰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동시에 온 세상에 지옥 불을 옮겨 붙이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3:14절은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하는 말과 거짓말을 경고하고, 4장 11절 이후에도 비방하는 말과 허탄한 자랑의 말이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경고합니다. 5장에서도 말에 대한 강조는 이어집니다. 5:9절은 원망하는 말을 심판과 연관해서 금하고 있으며 12절은 허탄한 맹세의 말도 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야고보가 이렇게 말에 관한 교훈을 계속 열거하고 있을까요? 말이 그 사람의 믿음의 진위를 판별해주는 가장 적절하고 선명한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논리를 되돌아보십시오. 성도의 구원은 진리의 말씀으로 낳음을 입은 결과입니다. 구원 얻은 성도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씨앗으로 심겨져 있습니다. 성도는 여러 시험을 통해 자기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받게 되고 그 말씀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리로 이끌려가면서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말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역동을 경험합니다. 이미 1:26절에 참된 경건은 가장 먼저 자신의 혀에 재갈을 물려 통제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구원 얻은 자의 삶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구원이 참된 구원이겠냐는 것이 야고보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의 논리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12:34-35절에서 말은 사람이 마음에 쌓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말이 곧 그 사람이며 말이 곧 믿음이며 말이 곧 인격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마지막 날에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심지어 사람이 말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말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지 않습니까?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 마음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그 부패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말을 타락시켰습니다. 말을 더럽게 하고 누추하게 하고 오염시켜서 그 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하게 합니다.

영어를 배울 때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전치사, 접속사, 감탄사 8품사를 가장 먼저 배웁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지만 실제로 배우는 9품사가 있습니다. 욕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이 교과서에 없습니다. 품사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품사는 욕입니다. 전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나이 60이 넘은 어른들인데도 대화마다 욕으로 연결되더군요. 젊은 학생들도 못지않습니다. 얼마나 욕이 많은지 모릅니다. 죄가 사람의 언어를 더럽고 누추하고 어리석게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죄로 말미암은 부패와 타락에서 구원받을 때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도 마음과 거기에서 나오는 말인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고 거룩하게 변화된 말을 빼고 구원을 증명할 수 있는 더 확실한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이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할 때 변화된 말의 행함으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야고보가 믿음의 열매인 행함을 이야기 하면서 가장 먼저 말을 거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일단 야고보는 우리가 다 말의 실수가 많은 존재인 것을 인정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말의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 중의 일부만 말의 실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말의 실수가 많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1절에 선생 되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선생이 가장 말을 많이 하는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말의 실수가 많은 존재인데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만큼 실수도 많을 것이고 실수가 많으면 말한 대로 심판 받을 때에 누구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함부로 선생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과 배와 불이라는 세 가지 도구를 통해 말의 지대한 영향력을 설명하는데 먼저 말들의 입에 물리는 재갈과 큰 배를 운행하는 키를 예로 듭니다. 힘 쎈 말들도 입에 재갈을 물리면 그 말을 재갈로 통제할 수 있고 큰 배도 지극히 작은 키로 운행할 수 있는 것처럼 혀도 작은 것이지만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통째로 제어하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혀가 미치는 이 절대적인 영향력이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곧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사도는 말의 재갈과 배의 키처럼 작지만 영향력이 큰 혀를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지옥 불을 옮겨 붙이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합니다. 말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보십시오. 무심코 한번 내 뱉은 말이 말을 한 사람과 그 말을 들은 사람 모두의 목을 쥐고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인터넷의 댓글 하나가 얼마나 작은 것입니까?

그런데 그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과 그 가족들의 삶의 수레바퀴를 송두리째 불태우 지옥의 불이 됩니다. 그 말이 온 몸을 더럽히고 영혼을 질식시키고 상처 내어서 피 흘리게 하고 아프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낙심하게 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결국 목숨을 끊는 자리까지 끌고 갑니다. 도둑맞아서 자살하는 사람 없고, 누군가에게 억울한 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 없지만 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말의 위력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연예인 최 진실이 자살 할 때 댓글이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적은 그 짧은 한 마디가 그녀의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사로잡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불태우는데 절망과 상처와 분노와 아픔 외에는 어디로도 그녀의 삶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삶의 수레바퀴를 태워버렸습니다. 삶의 수레바퀴가 불타면 더 이상 삶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사는 것이 지옥이 됩니다. 작은 혀로 내뱉은 악한 말 한마디가 누구에게는 지옥불로 옮겨 붙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불은 그녀만 태운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동생 최 진영에게도 옮겨 붙어 그 생의 수레바퀴도 다 태워 죽게 만들었습니다. 동생만이 아닙니다. 전 남편 야구선수 조성민에게도 옮겨 붙어 두 명의 자식을 남겨두고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하게 뱉은 말 한마디가 삶 전체를 불태우는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말의 파괴력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압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에 대한 격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알고도 말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딜레마입니다.

여기 언어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생의 딜레마를 보십시오. 온갖 종류의 짐승을 길들이는 사람이 정작 자기의 작은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다른 것들은 다 통제하고 다스리고 길들이면서 자신의 혀, 말을 다스리지 못하는 우습고도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을 보십시오. 7-8절이죠.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니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왜 그럴까요? 사람이 길들이지 못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거대한 코끼리도 사나운 맹수도 길들입니다. 사자도 호랑이도 곰도 길들입니다. 조그만 벌레도 길들이고 날아가는 새도 물에 사는 고기도 길들입니다. 독수리도 길들이고 까마귀도 길들이며 금붕어도 길들이고 모든 것을 길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있는 자기 혀는 통제하지 못하고 길들이지 못합니다. 다스리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혀가 불의의 세계이며, 쉬지 않는 악이며 죽이는 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능이 가장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작은 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가 만들어내는 불의와 혼돈과 무질서를 보십시오.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사람이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같은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앞에 있을 때는 아부하고 뒤로 돌아서는 욕을 합니다. 맞지 않는 것이죠. 이것은 같은 샘이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낼 수 없는 것처럼 마땅치 않는 것이고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무질서입니다.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낳은 죄의 영향이고 그 죄가 사망을 향하여 장성하는 죄의 권능의 결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자연도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허무한데 굴복해서 타락의 영향 아래 있지만 사람만큼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맺는 일은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포도나무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포도열매를 맺고 감람나무는 감람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합니다. 짠물은 단물을 내지 않고 단물은 짠 물을 내지 않습니다. 짠물은 짠물이고 단물은 단물입니다. 바닷물은 바닷물이고 민물은 민물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 모든 창조질서를 혼돈으로 몰고 갑니다. 한 입에서 단물과 쓴물이 동시에 나옵니다.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옵니다. 욕과 노래가 동시에 나옵니다. 혼돈 그 자체입니다. 자기 안의 말만 혼돈과 무질서와 불의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의 세상사도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종과 종의 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교만을 보십시오. 사자와 호랑이를 교배시키고 사과와 배를 교잡시켜 다른 종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혼돈스럽고 일관성이 없고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것을 일삼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며 그 대표적인 현상이 타락한 말과 일관성 없는 말과 혼돈되고 무질서한 말입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내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말씀 자신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그를 먹는 자는 그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생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은 마음과 말이 말씀으로 통제되어 바뀌고 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렇게 살아 있고 영영히 서는 말씀으로 그 일을 진행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돈과 무질서와 더러움과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는 말의 구원과 말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루어져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아 죽이고 파괴하고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피 흘리게 하고 지옥의 불을 옮겨 붙였던 우리의 말을 이제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위로하고 싸매고 고치는 말이 되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그래야 합니다. 말의 실수를 줄이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은 옷이나 먹는 음식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사는 집과 타고 다니는 차를 보고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말을 보고 압니다. 존귀한 사람은 존귀한 말을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합니다.

누가 비천한 사람입니까?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천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어도 비천한 말을 하면 비천한 사람이며 더러운 말을 하면 더러운 사람이고 누추한 말을 하면 누추한 사람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이며 말은 곧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심판 날에 말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말로 정죄를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먹고 말씀의 통치를 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혀가 길들여집니다. 혀가 길들여져야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사망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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