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의 중심처럼 무겁게 자리 잡은 조국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조국, 태어나면서 저절로 입혀진 살갗

조국이란 무엇인가? 조국은 태어나면서 몸에 저절로 입혀진 살갗 같은 것이다. 피부가 검고 흰 것은 내 조국이 검고 희어서 그렇다. 1970년 아서 펜(Arther Penn) 감독의 <작은 거인>(Little Big Man)은 더스틴 호프만(Dustin L. Hoffmann)이 열연한 감동 깊은 서부 영화다. 내게 있어 영화의 백미는 정작 호프만이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추장의 죽는 장면이었다. 잭을 키워준 샤이엔 족의 추장은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아 추장의 복식을 갖추고 자신의 신들에게 감사의 예식을 끝낸 후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다.

고교생이었던 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속으로 외쳤다. 백인이 아니라 동양인, 그것도 힘센 일본이나 미국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난한 한국에 태어난 사실을 감사드렸다. 좋은 시절이 아니라 시끌벅적하던 혼란기에 태어나 자랐음을 감사했다. 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의 부족한 모습과 결코 풍족하지 않은 현실의 삶을 진실로 감사드린다. 내가 받았던 많은 사랑과 적은 배신의 경험을 사랑한다. 풍요와 비천을 오가며 삶의 여유와 애환을 체득하게 되었음을 감사드린다. 삶의 숱한 위기를 벗어난 극복의 순간들로 인해 감사드린다.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 직간접적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드린다.

부모와 조상의 나라 그 이상의 의미, 조국

캠브리지 영어 사전에서는 조국(祖國)을 “본인이 태어났거나 본래의 고향이라 여기는 나라”로 정의한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부모와 조상의 나라”란 표현이 덧붙여졌다. 조국이란 본인과 부모와 조상의 나라다. 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3세들은 본인의 출생국과 부모의 나라가 다르기 때문에 아이덴티티에 혼란을 겪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한국과 미국이 경기할 때 부모들은 한국을 응원하는데 2세 자녀들은 미국을 응원한다. 물론 한국과 다른 나라가 경기할 때는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한국을 응원한다.

정체성 혼란은 생각 외로 심각한 문제다. 한미 간 동맹 관계가 깨지고 서로 적국 관계가 되었을 때 한국 태생의 미국 시민이 둘 중의 하나를 조국으로 선택해야 한다면 그 결과는 정반대이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을 택하든 나머지 나라로부터는 적대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2015년 5월 TV프로젝트인 <휴먼 다큐 사랑>에서는 “두 개의 조국, 하나의 사랑”이라는 타이틀로 쇼트트랙 선수 안현수의 기사를 다루었지만 심정적으로 수긍해도 현실적으로는 글쎄다. 둘일 수 있는 조국이란 없다. 조국은 하나다. 시민권을 획득해서 미국 시민으로 살아도 1세 이민자들이 뼛속까지 한국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국적을 바꾸는 순간 그 나라를 조국으로 간주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분명한 사실은 2세, 3세가 되어 완전히 그 나라에 동화되어도 코리언 어메리칸이지 어메리칸 코리언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국은 오뚝이의 무게 중심처럼 무겁게 자리 잡아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일어나라 조국의 자식들이여”란 가사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조국(la patrie)은 모국(the mother land)보다 더 짙은 부국(the father land)이다. 프랑스 혁명이란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이 노래 가사는 적개심과 전투 의지를 고양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평화 시에 부르기에는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프랑스는 ”마르세유의 노래“를 애창한다. 미국 국가 역시 전쟁의 색조가 짙다. 터키, 폴란드, 이탈리아 역시 적을 향한 증오와 승리를 위한 단결 그리고 결사 정신을 앙양시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민족과 국가일수록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지구의 마지막 분단 국가로 남은 조국의 애국가는 이들에 비해 너무 평화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앞뒤 분간을 할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면치 못하게 하는 실체로서의 조국을 부인했다. 1829년 독립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리스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조국을 위해 비적이 된 조르바는 민족주의적 전쟁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에 따른 파벌 전쟁으로 변모한데 대하여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경멸했던 조국은 실상 그의 마음에 오뚝이의 무게 중심처럼 그의 존재와 삶을 균형 잡아주었다.

이순신, 안중근, 학도병, 다르지 않은 조국

조국에 실망하고 조국을 성토하는 많은 목소리들의 배경을 살피면 그렇게 외칠 만큼 그들 마음에 무게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은 조국사랑의 실체라는 사실이다. 사랑을 위해 목숨 버리는 사람도 있고 사상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반납하는 사람도 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해간 수많은 영령들은 식을 수 없는 민족의 심장인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벅차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졌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십대 소년병들은 학교 운동장이 아닌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최전선을 달렸고, 농민들이 곡괭이와 삽 대신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해 침략자들에 맞섰던 것도 모두 조국 사랑의 뜨거운 피가 그들의 심장을 세차게 두들겼기 때문이다.

조국이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환히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늘 감지되는 실체다. 그만큼 조국은 신성하고 영원하다. 이순신의 조국이 다르지 않고 안중근의 조국이 다르지 않은데 남과 북은 여태껏 갈려 있다. 충혼열사들이 그토록 많이 일어났음에도 내 조국은 아직도 동강난 허리를 잇지 못하고 있다. 척추 마비가 된 상태에서 서로가 반신불수의 힘겨운 삶을 지탱하고 있다. 5천년 역사를 통틀어 남의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다지만 외침의 역사는 놀라울 정도다. 힘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길어서인지 몰라도 어떤 이는 993회나 침략을 당했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어쨌건 세계에서 가장 외침을 많이 당한 나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침략 당사자의 대부분이 중국과 몽골과 일본인데 아직도 두 나라는 간접적으로 이 나라를 수시로 침공하고 있으니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영토 침입만 해도 그렇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역사 날조를 하고 물량 공세를 가하며 세계를 속인다.

땅을 잃어도 빼앗길 수 없는 조국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조선>에서 밝혔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오늘 선생이 생존해 그에게 묻는다면 ‘내 소원은 남북통일이오!’ 다시 묻는다면 ‘우리나라의 통일이오!’ 또 다시 물어보아도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평화 통일이오’라 답할 것이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해방이 유일한 소원이었을 때 이 나라에는 무수한 애국지사들이 나타났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조국이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과연 조국을 위해 흘릴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가 남아 있는가? 너와 나의 조국이 다르지 않는데 다른 길을 걷고 달리 목소리를 내며 심지어 총부리를 겨눈다. 자유 대한에서는 백주 대낮에 각목을 휘두르고 물대포를 쏘고 투석전을 벌이던 일상이 엊그제 같다. 입씨름하고 주먹질해대다 아예 싸움질함은 어떤 동네의 일상과 정치판이 별반 다르지 않다. 붉은 머리띠와 현란한 현수막이 낯설지 않고 데모대의 함성이 너무 익숙하다.

잠시 다툼과 싸움을 멈추고 조국을 기억하자! 조상들이 남겨준 박동하는 역사, 우리의 후손들에게 넘겨줄 고귀한 생명체는 다름 아닌 민족혼으로 직조(織造)된 조국이다. 조국의 하늘은 민족의 가슴이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한반도의 하늘이다. 조국은 땅덩어리가 아니다. 땅이라면 강토를 빼앗겼을 때 조국도 사라져야 했다. 땅을 잃어도 조국은 잃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땅을 떠나도 조국을 떠날 순 없다. 고향을 고향으로 느끼기 위해선 타향으로 가야 한다면 타국에 살든 여행하든 남의 땅에서 느끼는 조국애는 남다르다.

우리 가슴에 있는 두 개의 조국, 이 땅과 하늘나라

조국은 식지 않는 심장이다. 북극의 얼음물에 담가도 차가와질 수 없는 심장이다. 이 뜨거운 피로 동족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으려나? 증오와 원한으로 깊이 팬 상처들을 싸맬 수 있으려나? 냉혹한 이념, 칼날 같은 사상으로 천 겹 만 겹 둘러싸인 심장도 덥힐 수 있으려나? 어머니 같은 대지에 봄의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아버지 같은 하늘이 새벽이슬을 흩뿌릴 때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따스한 햇살은 눈부시지 않으랴! 싸움질 몇 번으로 찢어지고 갈라져 소멸 될 수 없는 게 민족혼이라면 남극 빙하의 중심에 박혀도 결빙될 수 없는 것이 조국이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철새는 자유로이 날고 두만에서 낙동까지 강물은 바다로 흘러 서로 간에 뒤섞이는데 남과 북의 철길은 어찌 새롭게 단장하며 인천과 순안의 하늘 길은 언제 트일는지! 올림픽의 꺼지지 않는 성화도 꺼지고 위대한 통치자도 권좌에서 사라지지만 저마다의 마음에 각인된 조국과 민족혼은 꺼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이 땅의 조국과 하늘에 있는 조국이다. 조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순국으로 혹은 순교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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