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 - 선열[先烈]의 피와 순교자의 피를 수혈하라

한명철 목사는 말씀 연구와 기도에 매진해 온 목회자이다.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팍스신학대학원(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과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JSTB)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은혜와평강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명철 목사는 말씀이 어떻게 삶속에서 역사하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이의 삶을 헤집는다. 그는 책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데 혜안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책은 《강한 용사》 《살아난다 성경암송》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자기학습법》 (두란노), 《붕괴의 신호음이 들릴 때》 (쿰란출판사), 《고백》《전쟁》《소통》《부흥》《대언》 (본출판사) 등이 있으며, 약 30여권 이상을 출판하였고, 책과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테르모필레 제단에 바쳐진 300용사

모든 나라는 자신들의 영웅을 기린다. 조국애로 똘똘 뭉친 소수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나라마다 생명의 기지개를 편다. 영웅들이 흘린 뜨거운 피는 그래서 벼랑 끝에 선 조국의 최후 저지선이 되고 호국 영령들은 반딧불처럼 역사의 어둔 밤을 밝힌다. 때로는 애국 열사들의 피로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조국이다. 잃고 사라질 수 있기에 여전히 우리 존재의 기반이 되어주고 삶의 모퉁이를 지켜주는 조국의 품은 그래서 따스하다.

기원전 5세기 말엽,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좁은 협곡의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결사대와 막강 페르시아 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는 자신을 따르는 300용사와 함께 크세룩세스(Xerxes)가 이끄는 백만 대병과 맞장을 떴다. 불꽃 튀는 백병전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조국의 제단에 바치는 거대한 제사 의식과 흡사했다. 방패와 창만으로 무장한 밀집대형(phalanxes)의 300용사는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적병을 막아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시간을 번 연합군들이 페르시아 군을 격퇴시켜 조국 수호의 간성이 되었다. 자유를 향한 이상보다 불퇴전의 군법을 따른 실전 수행이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300용사의 죽음에 의미 부여를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식을 수 없는 심장을 가진 두 민족

거의 2천년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온 세계 곳곳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유대인들의 조국애는 유별나다. 중동 제국들과의 수차에 걸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다투어 조국 수호 전쟁에 참가했다. 그들의 조국애는 대단하다. 멀리는 기드온의 300용사, 세계 최강의 로마 군단과 최후까지 저항했던 마사다 전투, 가깝게는 1967년에 벌어진 6일 전쟁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조국이 존립할 수 있음은 이런 용사의 유무로 판가름 난다. 조국을 버리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진정 어려운 법이다. 과연 위기 앞에서 몸을 사려 조국을 떠나는 도망자들이 있는가 하면 안전지대를 떠나 험지로 몸을 돌려세우는 이들도 있다. 역사상 찬란했던 제국들이 사라진 과거를 회상하면 현존한 조국의 위대함에 자긍심을 느낀다. 대략 훑어보아도 거의 스물에 이른다.

고대 바벨론 제국, 애급 제국, 앗수르 제국, 신 바벨론 제국, 헬라 제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비잔틴 제국, 무굴 제국,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 잉카 제국, 대영 제국, 일본 제국 등이다. 중국은 수, 당, 명, 청처럼 왕조가 바뀌었을 뿐 제국의 명맥을 유지했다. 영국, 중국, 일본 정도가 현대 국가로서 옛 제국의 그림자를 비쳐줄 뿐 모든 제국들의 역사는 끝났다. 한국은 반짝 했던 대한 제국 시절보다 더 강건한 국가의 모습을 지금 견지하고 있으니 어찌 뿌듯하지 않으랴! 제국은 아니어도 이스라엘처럼 강소국으로 이 시대에 자리매김할 수 있음은 조국에겐 식을 수 없는 심장이 고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 저항운동의 불씨, 동학군

시신 되기를 거부한 이 민족의 가슴에는 식을 수 없는 심장이 있다. 조선 중엽부터 일기 시작한 농민들의 저항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외길이었으나 부패하고 나약한 조선에게는 극약 처방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만성 무력증으로 숨만 쉬고 있던 조선의 느린 맥박을 기동시킨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좁은 땅 여기저기에서 저항의 외침이 터져 나왔고 한숨 섞인 비명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이 되어 강산의 고막을 뚫었다. 조선 말기에 작은 마을의 군수가 저지른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군은 근대 한국 이후의 각양 저항운동에 불씨가 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측근의 밀고로 조선과 일본의 동맹군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두 차례의 전란이 왜구에 의해 저질러진 참화였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세력을 깔아뭉개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얼뜨기 같은 조선의 권부로 인해 조선의 맑은 정기는 다시 한 번 더럽혀졌다. 아, 부끄러운 조선 말기의 민낯이 낯설기만 하다. 그런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순결했던 역사가 잠시 더럽혀졌음은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과의 악연은 지금도 진행형이니 역사의 아이러니에 유구무언일 뿐이다.

한반도에서 번진 들불, 만주로 시베리아로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민족의 역사가 유린당하고 말과 글을 강탈당했을 때 일단의 저항 집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삼일 만세 사건을 전후하여 누룩처럼 번진 조국애가 잠들었던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웠다. 바람 앞의 촛불이거나 기껏해야 모닥불 정도라 여겼던 일제는 때마침 외쳐진 민족자결주의와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무서운 기세로 번져갈 줄 미처 상상치 못했다. 풀뿌리 민중의 저항은 몇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삼천리에 메아리칠 만큼 거국적인 항쟁으로 비화되었다.

본토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은 지도자들은 드넓은 중국을 피난처 삼아 곳곳에 둥지를 트고 독립 운동에 나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립군들이 만주 벌판을 달리고 시베리아의 동토를 걸으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짓밟히고 쓰러져 죽은 것 같던 들풀도 바람이 불면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잡초 같은 민중은 짓밟힐수록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으며 일제에 격렬히 저항했던 것이다. 오늘 후손들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름조차 모를 숱한 애국지사들이 아낌없이 쏟아주었던 뜨거운 피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집고 일어서니 원수 치 떨고

피 뿌려 물든 골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의 정신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 맘 한 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독립 독립 조국 광복

민주 국가 세워보자

 

-광복군 행진곡-

 

밀알 같은 영웅들이 이어온 한민족의 질긴 명맥

역사의 거친 숨결 속에서도 항쟁의 거친 비바람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을 버려 나라를 구하고자 밀알 같은 영웅들이 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무너져 내린 붕괴의 현장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은 것은 코리언의 얼이었다. 수차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끝까지 항전했던 삼별초의 깃발은 부러져 탐라의 화산석과 비바람 속에 묻혀버렸어도 코리언의 얼은 죽지 않았으니 그들의 저항 정신이 있어 이 나라의 터를 굳게 다질 수 있었다. 역사의 고비마다 ‘난’을 극복하면서 축적된 코리언 스피릿이 코마와 같은 일제 강점기에도 한민족의 질긴 명맥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간절함이요 처절함이다. 때로 간절함은 노래에 실려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조국애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다. 애절하고 뭔가 짠한 그런 절박함이다. 일생을 피아노곡만 작곡했던 쇼팽은 연주 여행 도중에 조국에서 일어난 혁명 소식을 접하고 혁명 성공을 갈망했지만 혁명군은 러시아 군대에게 무너져버렸다.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그토록 희구했음에도 생전에 조국을 찾지 못한 쇼팽은 사후 유언에 따라 조국의 품에 안겼다. 그 자신도 한 때 혁명 전사였던 스메타나(B. Smetana)는 조국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에게 점령당하자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을 만들어 조국 독립에 대한 간절함을 담았다.

 

순국열사와 순교자의 피를 수혈하라

한반도의 좌우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은 앞으로도 숭고한 이 민족의 발목을 잡을 실질적인 비호감 세력들이다. 외교를 통해 친밀도를 아무리 높여가도 양 날의 비수처럼 이 나라를 불편케 할 존재들이다. 외침의 역사 속에서 굵직한 참화는 모두 그들 두 나라로 인한 것이었다. 거란의 조련사 강감찬의 현신이 있어 중국을 상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목을 겨눈 비수 이순신의 그림자가 있어 일본을 경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서해 어장이 대국의 망나니들에게 의해 결딴나고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이 버젓이 세계를 상대로 난무해도 소극적 대응에만 급급한 이 나라 정책 입안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실로 장군들이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 두 눈을 부릅뜰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의 경제력은 거대하고 견고하다. 그들의 군사력은 비교 불가 수준이다. 민족의 도덕적 강도나 영적 탁월함에 있어 몇 수 위라 자임하던 때가 그리 오래지 않은데, 지금 조국의 정신적, 영적 토대는 일본에 비해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긴 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자신하기 어렵다. 그것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헌신에서 나타나는 지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연코 국민 의식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식어버린 조국애의 심장을 데워야 한다. 미지근해진 민족정기에 온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순국열사와 순교자들의 뜨거운 피로 무관심과 이기주의로 메말라버린 피를 수혈해야 한다.

 

조국의 강토를 부모의 몸처럼

너무 갈라지고 나누어졌다. 너무 바빠지고 급해졌다. 조국애의 용광로 안에서 지역 이기주의와 분파주의를 녹여야 한다. 잠시 쉬면서 너와 내가 조국의 뒷모습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으로 한 번에 한 발자국씩 미래 세대들을 위해 다가올 미래의 전용도로를 닦아나가야 한다. 찢기고 상한 마음들을 서로 어루만지면서 희망을 노래하고 조국의 미래를 그 희망으로 앞당겨 나가길 빌고 또 빈다. 조국의 현실이 파탄 나면 조국의 미래란 없다. 조국을 견고케 할 주춧돌은 아니더라도 빈 곳 메울 잔돌 하나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천과 길바닥에 나뒹구는 깨진 병조각이나 쓰레기를 줍는 고개 숙임이 이 땅을 지킴이다. 미세 먼지 가감 장치가 없어도 매연과 공장 시설을 제대로 관리함이 저 하늘을 지킴이다. 하늘은 조국의 얼굴이요 대지는 또한 조국의 가슴이니 하늘과 땅 대함을 조상의 몸 대하듯 하면 우리 사는 세상은 훨씬 나아지리라. 극지의 얼음에 수백만 년 갇혀도 결코 식을 수 없는 심장인 조국은 너와 나의 생명을 날줄과 씨줄 삼아 서로 얽혀 있는 한 역사의 결을 따라 영구히 박동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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