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일 고경태 지음, 바이블리더스 발행

【오방선생 최흥종】은 우리나라를 한센병완치국가(WHO공인)로 한국 최초의 한센병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애양원의 전신)을 설립하였고, 소록도를 세계 최대의 한센인 갱생촌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최흥종 목사의 기이한 행적이 많아 “목사”보다 “영원한 자유인”, “무등산의 성자”, “한센인의 아버지”, “무등산의 기인” 등으로 각인 

SBS-TV 성탄특집 다큐멘터리 <오방 최흥종>이 지난 1월 3일(목) 오후 4시에 재방영되었다. <독자들의 시청소감>

"최흥종목사의 일대기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훌륭한분이 계셨다는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렸고, 목회자의 길을 조명해 주어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와 같은 신앙 모델이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며 기독교의 위대한 자산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와 정말 비교되는 모습이어서 보는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줄 것 같아요"

최흥종 목사에 대해서는 광주YMCA 등 사회단체나 관련된 복지기관 등에서 기념하고 있지만 “교회 세움”이나 “복음 전도”에 관해서 선한 영향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는 목사 최흥종에 대해서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 광주지역의 대표적인 목자의 표상으로 세워서 이 지역의 역사인식을 바르게 하려고 한다. 물론 목사 최흥종은 광주 지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땅 전체에서 유력한 인물이었다. 한센인을 위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 한센인을 보호하였고, 전국 여성운동에 이바지하였다. 20세기 한국의 가장 큰 영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저자 : 최장일
광주일고, 총신대학교 신학과, 감신대학교 대학원(TH.M) 졸업 
사랑의터치 암치유선교회 선교목사, 기독경영개발원 원장 
한국산업심리건강센터 소장 
현)인터넷신문 <본헤럴드> 주필 겸 편집국장

저자 : 고경태
조선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총신대학교 대학원(Th.M, Ph.D) 
현)주님의교회 담임목사, 형람서원 대표 
현)인터넷신문 <본헤럴드> 편집위원 
현)총신대, 한영신학대 강사(조직신학)

목차

책머리에 한국의 초대 사도 오방 최흥종 목사 /11 
진보보다 더 실천적인 보수, 최흥종 목사 /19 
오방(五放)에 나타난 성령과 육체 /38 
최흥종 목사의 생애와 목회활동 /54 
삼일운동과 오방 최흥종 /74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85 
소록도와 최흥종 목사 /97 
서서평 선교사와 최흥종 목사 /101 
사망통지서와 조선교회 /110 
죽어도 산자와 살아도 죽은자 /119 
교회괴사 증후군에 걸린 조선교회 /126 
1964년 12월 30일, 유언장을 남기다. /134 
최흥종 목사와 동광원(東光園) /147 
최흥종 목사의 신앙으로 본 한국기독교 /157 
함석헌의 멘토 최흥종 목사 /162 
양림동과 최흥종 목사 /166 
정율성과 최흥종 목사 /169 
광주중앙교회 설립 목사 최흥종 /181 
오방을 아는가? 최흥종을 아는가? /191 
최흥종 목사의 역대기 /197 
오방로 지정 건의서에 첨부된 최흥종 목사의 공적 /233 
1986년, 서거 20주년 추모사 /248 
참고문헌 /249

오방선생 최흥종 목사가 소천되기 하루전 1966년 5월 13일 남긴 

최후유언장

 

" 말은 못해도 정신은 총하다. 최후유언

예수잘 믿고 구원(확신을 가져라)...

나는 가도 영원 미래세계에서(만나자)...

죽는것이 아니니 염려말라...잘있거라. "

1966년 광주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오방 최흥종 목사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는 의제 허백련 화백

1. 오방선생 최흥종(崔興琮,1880년5월2일~1966년5월14일)은 목사이다. 기독교 목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킨다. 최흥종 목사는 "오방선생"으로 잘알려져, "오방선생 최흥종"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 최흥종"을 부각시키고 싶다. 최흥종은 광주 최초의 장로였고 목사였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사역하고 광주 무등산에서 소천된 그리스도인이고 목사이다.

가운데 한복 입은 분이 오방 최흥종 목사

2. 오방선생 최흥종은 1904년 12월 25일에 선교사들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고, 장로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기도 했고, 석방되자마자 북문밖교회(현재 광주중앙교회)를 분립해서 개척했다. 그리고 시베리아 우스리스크 지역에 2회 해외선교 활동을 했고, 소련이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동포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면서 사역의 동력을 상실했다. 그 후 귀국하여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사역하셨다. 그리고 1909년부터 한센인들을 돌보는 사역을 진행했다. 당시 동갑내기 선교사인 서서평, 윌슨과 동역했다. 

3. 오방선생 최흥종 목사는 1920년 12월 2일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당시 신학생은 각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몇 개월간 평양신학교에 모여서 공부를 했다. 당시 교회와 사역에는 성경과 기도만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최흥종은 성경의 핵심 사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정확하게 실천했다. 이러한 사례는 칼빈에게서 나타났다. 칼빈은 제네바, 한 도시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효과적으로 구성한 최초의 사역자이다. 칼빈은 1,000년의 기독교 자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었지만, 최흥종은 성경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회 질서를 구현했다. 가장 약한 이웃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일으켜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했다. 그리스도인은 풍부한 자료와 성경과 기도로 진행해도 동일한 방향으로 유사한 현상을 발생시킨다.

4. 오방선생 최흥종이 후기에 만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유력한 수도공동체 지도자들이었다.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준 등이다. 그들은 가난한 환자나 장애자들을 돌보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런데 교회는 그들을 신비주의자로 부른다. 사랑을 실천하면 신비주의자인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최흥종 목사는 장로교 목사이지만 영성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가르침을 준 사역자로 이해할 것을 제언한다. 

5. 오방선생 최흥종은 1935년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정관수술을 했다. 그리고 5가지를 버린다는 뜻에서 오방을 선언하면서, 오방 최흥종이 되었다. 1935년은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의 마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때이다. 조선장로교회의 각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면서 결국 1938년 9월10일 총회에서 신사참재를 결의했다. 최흥종은 신사참배 거부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필자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표현, 한상동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를 조직적으로 운동함, 박형룡 박사의 망명 그리고 최흥종의 자기부인 등을 모두 다양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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