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면,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

박호용교수, 대전신학대학교 신대원장, 연세대학교(B.A, Th.M, Ph.D), 장로로신학대학원(M.Div.) 등, 저서: 창세기 주석 외 10권 이상, 설교집: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외 6권, 역서: 모세 외 4권, 왕성한 연구 및 복음 사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1. 산상수훈에 8복의 말씀이 있듯이, <유레카 8복>의 말씀은 이러하다.

전화번호 408-539-1136(창40:8, 사40:8, 요5:39 의미)이 <이론원리 4복>이라면, 전화번호 123-317-413-2024는 <실천적용 4복>에 해당한다. 여기서 123은 창세기 12장 3절을, 317은 에스겔 3장 17절을, 413은 빌립보서 4장 13절을, 2024는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말한다. 이 네 구절을 반복해서 암송하며 실생활에 적용할 때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여 삶을 변화시킨다. 이 네 말씀을 하나씩 부연 설명해 보자.

 

2. 첫째, 창세기 12장 3절 말씀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구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브라함의 소명을 말하는 이 구절은 원역사(창 1-11장)을 끝내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시작하는 족장사(창 12-50장)의 서문 속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한 새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란에 있던 그를 불러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하나님의 ‘가라’ 는 명령은 아브람에게는 지연과 혈연으로부터의 ‘떠남’을 전제로 한다. 떠남은 기득권의 포기인 동시에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큰 민족을 이루는 복과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12:2). 그러고는 또 다른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12:3)이다. 이 구절은 실로 엄청난 복에 대한 선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자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민족)는 축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민족)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축복과 저주의 열쇠, 세계사의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가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유대인)의 자존감, 자부심, 자신감의 근거가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인 우리의 자존감, 자부심, 자신감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땅의 모든 족속, 즉 열방이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된다는 말씀은 ‘복의 통로’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위에서 언급한 엄청난 복을 허락해주신 것은 그들만이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열방으로 그 복을 흘러 보내라고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복을 받은 선민(성민)이라는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복의 통로로서의 선교적 사명(책임)을 망각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열방에 대한 선교적 사명을 망각한 그들은 결국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 포로민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음을 이스라엘 역사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은혜로 구원(복) 받은 자로서 복음의 통로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복 받는 자이고 복 받는 길(비결)이다.

 

3. 둘째, 에스겔 3장 17절 말씀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의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제사장 사독의 가문에 속한 에스겔은 25세의 나이에 바벨론의 침공에 의해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주전 597년). 유프라테스 강 지류인 그발 강 근처 텔아빕에서 절망 속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찬란한 은빛 광채로 찾아오셨고, 에스겔은 그의 나이 30세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겔 1:1-3).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6-7).

그러고는 선지자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겔 3:1). 하나님이 주신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에스겔은 그 받아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해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 사명을 구체적으로 말씀한 것이 바로 이 구절(17절)이다. 에스겔의 사명은 ‘포로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이 되라’는 놀라운 사명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파수꾼의 임무는 밤낮으로 망대에 올라서서 외적이 침입하는지를 잘 살펴서 알리는 보초병의 임무였다(합 2:1). 영적 파수꾼인 선지자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보초병처럼 영적으로 늘 깨어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모두 정확하게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파수꾼 에스겔은 이스라엘에 임박한 심판의 말씀으로 의인과 악인(겔 3:18-21) 모두에게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서 이 백성을 깨우쳐야 하는 영적 파수꾼들이다.

 

4. 셋째,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쓴 편지로써, 노신앙인의 감동적인 신앙고백을 담은 바울서신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인데, 4장(전체 104절)에 기쁨 관련 어휘가 16회나 나온다. 인생의 막장인 감옥에 갇힌 상황 속에서도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쁨이 세상적인 그 무엇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영적 기쁨에 근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은 투옥과 같은 시련이나 외로움, 또는 원수들의 적대적인 행동조차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앞에 있는 11-13절의 맥락 안에서 살펴볼 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11-12절에서 바울은 가난한 상황(비천, 배고픔, 궁핍)과 풍부한 상황(풍부, 배부름, 풍부)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여태까지 다 경험해 본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이 대조되는 두 상황 속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13절이다. 따라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은 나폴레옹이 한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그런 뜻의 전능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말은 능력 주시는 자 하나님(주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일체의 것(상황)에 대한 초연함과 자유함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요 감사요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을 이기는 일체의 비결이 이 구절에 담겨 있다.

 

5. 넷째,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이며, 그 사명을 위해 그가 지금껏 어떻게 살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구절이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고, 그들 앞에서 행한 고별 설교에 속하는 이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렇다.

바울은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선교 여행을 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남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선교 사역이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았음을 엿보게 된다(행 20:22-23).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유대인들에 의해 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임을 잘 알기에 그 길을 가지 말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행 20:36-38).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기로 굳게 다짐하면서 행한 설교의 한 대목이 바로 이 구절이다. 바울의 이 같은 결정은 죽기 위해 예루살렘 행을 감행한 예수님처럼 자신도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뜻에서임이 분명하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다멕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구약 율법에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몰랐다. 그런 그가 다멕섹에서의 회심 체험이 있은 후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즉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접하고 ‘유레카’의 감격을 맛보았다.

그 후 바울은 일생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자 남선북마, 동분서주하면서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이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 후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바울이 얼마나 자신이 받은 사명에 충실했는가는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고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면,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들은 자신들이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사명은 무엇이며, 그 사명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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