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야! 놀자

언젠가 김 동길 교수가 
"한살에서 서른 까지는 하나 둘로 나이를 먹다가,
서른 부터 마흔까지는 두살 터울로 가더니만,
오십이 되고 부터는 오십, 오십다섯, 
예순, 예순다섯으로 뜀박질을 한다"고 하더니,
나이 칠십 중반이 된 이제사 
그 말이 실감이 난다.

내가 육십 중반에 춘천으로 이사와  행복이 가득한집(요양원)을 
운영해 온지 어느덧 만 십년이 되었다.
세월이 가는게 아니고 뛰어 간다.

십 몇년을 내가 모시다가 
99세로 소천하신 이금석권사님의 외 증손녀(당시 다섯 살)가 
"할머니 할머니는 나이가 맛있어?" 하고 묻더란다.
99세 연세가 많긴하지만 
그 나이가 맛있어서 먹었겠는가?
어려 철 없을땐 
"내도 언제나 어른되나" 그랬는데
막상 나이를 먹어 노년에 이르면 
어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지요,

나이 팔십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친구야! 놀자’ 하며
아직도 친구를 찾아다닌다면,
좀 주책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늙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그러나 마누라와 
4층 요양원 방 한칸을 쓰고 있으면서
아흔 한분의 노인분들과 항상 얼굴을 맞대고 살고있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많지만,
오십대 후반 부터 칠십대까지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어슷한 이들도 많다.

인생의 종착역에 온 이들의 사연은 실타래처럼 끝이 없지만,
한가지 동일한 것은 
심지가 타 들어가듯 
이제 생명의 심지가 
다 꺼져가고 있어,
이들에겐 내일에대한 여망이 
없다는 것이다.

나를 친구랍시고 
내 곁으로 잠시 와 있던 
안정훈목사가 어제 주일 아침에 소천했단다.
삶에 애착도 많더니 
생동하는 사월에 
꽃구경 소풍 왔다가 가듯 떠났구나!

내가 노인들을 모셔온지 만 이십년, 
그동안 약 200여 분이 
내 곁에서 소천하셨다.
알 수 없는 것은 
금방 죽을 것 같던 사람은 안죽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가 
갑자기 떠나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핸디캡이야.” 
몇해 전에 입소해서 얼마 전에 소천한, 걷지는 못했어도
정신은 멀쩡했던 노인의 말이다.
이것이 요즘 사실로 증명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눈이 나빠져 점점 
실명이 돼 가고, 
또 누군가는 귀가 안들려 
반밖에 듣지 못하고, 
어떤이는 별안간 이가 몽땅 빠져 
하루아침에 폭삭 늙은 
할망구가 되어 버린 이도 있다.

무릎이 아픈 것은 이제 애교고, 
어지럼증 때문에 불평을 했더니 
의사 말이 
"이제 늙어서 그러니 그렇게 알고  
그런가 보다 하고 살라"고 했단다.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 
'어디 억울해서 살겠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 
귀가 나빠진 것을 시로 썼다.
‘이제 귀가 반밖에 들리지 않아도 감사하다,’고.
이 한마디는 
정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팔십이 넘었어도 
지금 이렇게 숨쉬고 살고 있다는 말,  이젠 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 세상을 떠난다 해도 별로 억울할 것이 없다는 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이다.

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또 십년쯤 남보다 더 산다 해도 
먼저 가고 나중 갈 뿐이지,  
가는 길은 다 똑 같다.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병실에 갇혀 산다면 
그게 어디 사는 겐가? 
똥 오줌싼 기저귀를 갈아끼고 
여기에 인간의 존엄이란게 
어디 있겠는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내 몸을 예전엔 
내가 종부리듯 
하자는 대로 
가자는대로 움직여 주더니,
언제부턴가 내 상전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치매가 와서 
이젠 운전하기 어렵겠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은 친구가 있다.
그가 집에서 십리길에 
아내가 묻혀 있는 산소에 가서 
"내가 이젠 자주오기가 어려워"
손으로 봉분에 솟아난 쑥뿌리를 뽑아주며 독백처럼 토로했단다.

나도 몇년 전엔 일종면허였는데 
지금은 눈이 나빠져 
2종면허로 강등됐다.
운전은 자유를 준다.
운전을 못한다면 살아도 
반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

청평 무의탁 양로원할 때부터 
춘천 요양원 주방에서 몇년 전까지 주방장으로 일하던 정현순권사도 손발이 무거워져 
요양원에 입소를 했는데 
며칠전에 화장실에서 
날아다니는 무당벌레를 잡다가
손목과 허리를 다쳐 졸지에 거동을 못하고 있다.

조란 할머니는 
요양원 바로 옆집에서 오셨는데 그런대로 걷기도 하시고 
식사도 괜찮게 하셨는데 
강원대병원에서 암진단을 받고는 
그날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신다.

나이 구십이 넘은 한 할머니는 
아직도 자신이 정정하다고 착각하다가 벌써 몇 번을 넘어져 병원에 실려 갔다.

이젠 주변에서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슬슬 줄어들고 있다.

머리가 아파서,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서, 
잠을 잘 못자서  놀자면 나갈 수가 없단다.
‘친구야! 놀자!’ 하며 
달려갈 수 있는 친구가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운전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빨리 오지 않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처지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처량하고 슬프지만 이것이 다 인생의 한 고비임을 
깨닫는다.
그래도 아직은 ‘친구야! 놀자!’ 
하면 달려 나올 수 있는 
친구가 몇 명 있다는 것이 
새삼 위안이 된다.

안정훈 목사를 이제 이땅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렇게도 간 이식을 바랬던 친구여!
이제 병든 짐을 벗었으니 
하나님 품안에서 평안하라!

고려대, 총신대학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부활절】피는 꽃과  지는 꽃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지는 꽃또한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점차 아열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사계절은 아직 완연합니다.
어느 누가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고 했던가!
그 어린 새 싹이
겨우내 동장군이 머물다간 
얼음장 처럼 차겁고 단단한 땅을
강인한 새명력으로 
뚫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봄은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롭습니다.
각양 각색의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며 고운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는 봄의 매력에
우리는 속수무책 
푹 빠질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꿰차고 있는 곰배령엔 
우리나라 고유의 토종 꽃들 
20%가 자생하고 있을만큼 
자생화들이 널부러져 있답니다.

보십시요!
우리가 살고있는 
시골 마을 고삿길 옆에도 
봄을 알리는 이름모를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허지만 우리의 청춘도 짧듯이 
봄날 또한 꿈결처럼 아주 짧습니다.
내가 살고있는 봄내(춘천)는 
아직 벚꽃이 이제막 만발하고 있는데,
저 남넠땅 벚꽃들은 벌써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니, 
할머니 손을 꼭 잡고 하교하는 
손녀의 얼굴 위로
바람에 지는 꽃잎새들이 
눈꽃처럼 꽃샘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집니다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에도
새 순같은 손녀의 얼굴에도
금새 새하얀 웃음꽃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꽃이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꽃이 지는 것또한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존재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소멸되는 것
사라지는 것
계절을 따라 가고 오는 모든 것들이 조물주의 깊은 의미와 섭리를 
깨닫는 것이 것이 은혜요 
삶의 아름다움이겠지요.

성경에
"인생아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너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우리가 오고 가는 인생의 무대위에 
마냥 머물러 있을순 없잖아요?
때가 되면 퇴장을 해야 
다음 연출자가 다시 이 무대위에 
서게 되지요
유한한 이땅에서 태어난  생명체는 존재와 소멸 사이의 경계에 서서 
끝없는 연출과 퇴장을 거듭합니다.

이제 고인이 된 어느 교수가 쓴 
'왜 사느냐고 묻거든' 이란 책 이름이 문득 생각나는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기 때문' 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해서 
'삶이란 충만한 열정을 지니고
의미있는 삶을 연출하는 것'임에도
이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흡을 함께 하고있지만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그래서 삶의 가치마저 잃고 사는 
모습들을 봅니다
삶의 진수를 잃어버린 삶
삶의 열정이 사라져버린 삶 
그래서 혹여 나도 
이미 가치없는 존재로 전락해서
있으나 마나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무지(無知)한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이땅에서의 삶은 
불과 33년 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사렛에서 사신 30년을 제하고 나면 
불과 3년 간의 공생활 기간이 
전부라 할수있습니다
이 시기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삶의 가치와 삶의 진수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의 삶은 '예와 아멘의 삶'이셨고
'순종의 삶'이셨고
'섬김과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오로지 당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말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존재와 소멸 사이의 경계에 서 계십니다
살기등등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모함을 지어 내서라도 
예수님이란 존재를 소멸시키기 위해
굶주린 아귀처럼 모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존재(삶)와 소멸(죽음) 사이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따라서 잇단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으시며 당당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생명은 물론 
이미 죽음조차 정복하신 
메시아 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사흘간의 수난과 죽음의 시기에
잠시 이 땅 위에서 소멸되시지만
그러나 즉시 소멸에서 존재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광스런 부활로 
죽을 운명인 우리
완전히 소멸될 운명인 우리를,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영원한 은총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송과 열정으로 충만한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한권의 책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다 쏟아 인생의 책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책은 단 한번밖에 읽을수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떤이는 부귀와 영예를 얻었다네
또 다른 어떤이는 
환란 폭풍이 일렁이는 바다로 나갔다네,
또 다른 어떤이는 
대한항공을 두고 떠나고
또 다른 어떤이는 아시아나 항공을 인수 했다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날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였네!

 

 

【광복절설교】 칼을 녹여 보습으로

사람을 죽이는 칼을 녹여 심령의 밭을 일구는 보습으로, 미가서 4:1~5

1970년대 유신독재가 국민의 자유의 숨통을 조이던 때 저항시인 신동엽은 "껍떼기는 가라! 이 땅의 모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쳤습니다. 일찌기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가 창으로 상대를 찌를때 방패로 막는 역사를두고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바로 오늘이 일본 군국주의로 부터 해방된 '광복절'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한 민족시인의 애끓는 절규가 예언의 능력이되어, 8·15광복이 꿈같은 해방이 이 땅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민족해방의 기쁨도 잠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념과 강대국의 입김으로, 다시 이 조국 강토는 남과북으로 분단되고 일본의 압제가 아닌 동족끼리 칼과 창으로 살륙하는 비극의 6 25 민족전쟁이 있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 시대에는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나고,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리듯, 이념 때문에 동족이 서로 살생하는 비극을 낳은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주전 7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와 동시대의 인물입니다. 이사야는 유다왕국 왕족의 귀족 출신이라면 미가는 하층민의 농사꾼 출신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스라엘은 오늘의 우리민족처럼 북은 이스라엘로 남은 유다로 찟겨져서 서로 원수처럼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미가서 3장12절에서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시온은 잡풀이 무성한 폐허가되리라."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유다왕국은 바빌로니아에 멸망을 당하여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구세주의 오심을 미가서 5장2절에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미가서 5장2절에서 말씀한 구세주가 이땅에 오시면 오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민족은 지난 날 이스라엘 민족처럼 서로 칼과 창을 만드는 일에 국력을 낭비하여 왔습니다. '극동 아시아의 한반도'는 러시아·중국·일본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 등의 열강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아직도 냉전의 논리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치되어 불신과 반목으로 가득차 있어서,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들어야 함에도 서로가 상생이 아니라, 너죽고 나 살자하는 증오의 칼을 갈고있습니다. 이 물고찢는 분단의 죄에 대하여 우리는 한결같이 이러한 이념의 논리에 매여 평행선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다가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금 남북이 화해의 손짖을 하고 있습니다.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만 북쪽과 화해의 물꼬를 트면서 적폐청산이란 미명 하에 전정권 대통령 두분을 '통치를 법의잣대'로 수감하는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저 수감된 두분은 이를 용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국론도 4분5열되어 가고 있습니다. 잘했던 잘못했던 지난 날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택한 분들입니다. 심판은 현정권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을 열고 두분을 자유의 몸으로 사면해 주어야합니다.

여러분! 이 민족이 남북으로 찢겨지고 또 남남(南南)끼리 사분오열된 원죄가 어디서왔습니까? 저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죄가 가정을 찢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시키고 형제 간의 우애를 찢어 이간시키더니 종내는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입니다. 이처럼 이 민족이 4분5열로 찢겨진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그래서 모든 것을 내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는 죄성의 문제요, 인간과 사탄과의 문제요, 하나님과 인간과의 불통의 문제입니다.

먼저 우리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멧세지는 상대방을 향한 말씀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민족의 얼 속에 하나님이 없는 민족(사람)은 오로지 칼을 만들고 칼에 날을 세우며 삽니다. 진실로 예수의 제자된 성도는 칼을 녹여 심령의 밭을 가는 성령의 보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신앙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칼과 창을 녹이는 성령의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망의 무덤을 열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사망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로마의 칼을 부러뜨리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다."라고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바가 아니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는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로마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성령이 네게 임하면 네 마음 안에 품고있는 복수의 칼이 보습으로 바뀌어 질 것이다. 네가 로마를 향하여 갈고 있는 복수의 칼이 보습으로 바뀌어 지는 날, 너는 로마를 말씀의 보습으로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엎기 위해 로마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여 동안 제자들에게 귀가 닳토록하신 말씀이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여상히 로마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말고 너희가 내게 들은바 아버지가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마지막 당부의 말씀에 순종하여, 120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온전히 기도에 힘썼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원수 맺는 것, 증오심, 적개심 등 온갖 부조리와 죄악의 칼을 보습으로 만드는 대장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칼을 보습으로 만드는 여러분 자신의 대장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에 대하여 복수의 칼을 갈던 베드로의 심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성령의 역사는 그를 완전히 갈아엎어 사랑의 사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만드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 로마로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성령의 보습을 가지고 세계열방으로 나아가 저들의 묵은 마음밭을 갈아엎었습니다. 바울역시 철저한 유대주의자였지만 그가 어느날 날빛보다 더 밝은 부활한 예수를 보는 순간 그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고 하나님의 인격을 보았습니다. 한 순간에 성령이 그를 성령의 용광로에 넣고 복음의 보습으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쟁이들을 잡아서 감옥으로 보내던 박해자가 이제 예수 때문에 자기가 감옥에 가고 예수때문에 순교하기까지 작은예수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로 갈라디아로 안디옥으로 고린도로 그리고 로마로 그는 두려움없이 거칠것없이 예수그리스도의 화신이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저들의 마음밭을 갈아 엎었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서방 유럽을 복음화시키고 로마를 복음화시키고 마침내는 전세계를 복음화 시키고 그리고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증오와 이기심으로 점철된 복수의 칼을 갈던 심령을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보습이되기 위하여 성령의 용광로에 우리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저 중동전쟁이 왜 멈출 줄을 모릅니까? 유대의 율법과 이슬람의 코란 속에 칼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동의 석유가 세계 열강의 눈들을 끌어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처럼, 먼저 나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내 아집 내 상식 내 사고방식으로 꽉 채워져 있는 나의 묵은 심령의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외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풀을 갈아엎고 파종하라.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의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땅을 갈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의를 빛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열매를 먹었나니"

이땅 위에 기독교라는 종교만 있을 뿐, 생명을 잃은 민족의 마음밭을 갈아엎을 성령의 보습은 잃어버렸습니다. 저 유명한 찰스피니 목사가 어느 지역이든 들어가 부흥집회를 하면 그 지역사회가 달라졌습니다. 술과 담배를 즐기던 사람이 금연 금주를 하니 술집과 담배가게가 사라지고 범죄자들이 없어지니 교도소가 텅비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15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다시 로마서 12장 18, 20~21절에서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가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 위에 올려놓음 같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러분! 혹 미워하는 사람이있습니까? 그러하다면 아직 가인의 후예입니다. 미움 시기 증오는 살인자요 끊임없이 불란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전쟁문화 군사문화는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2차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작태를 보십시오. 역대 일본수상마다 전쟁의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에가서 참배하고 있습니다. 세계전쟁을 일으켜 온 인류에게 대 재앙을 안겨준 전범들에게 일국의 수상이 참배라니요. 참회는 고사하고 이 모든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 당시 이스라엘민족의 통일국가로의 해방의 길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앗수르, 바벨론, 애굽 등 세계 열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이 찢겨져 서로 칼을 갈고 있었는데 칼을 보습으로 바꾸어 민족이 하나되는 해방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진정한 민족해방은 마음 속에 있는 칼을 녹여 보습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성령의 불로 녹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 나라의 모든 성도는 칼을 녹이는 용광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칼을 녹여 보습을 주시려고 사도들도 주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죽여 보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증오로 가득차 있는 이 민족의 마음밭을 갈아엎는 보습이 되어야 합니다. 보습이 되기 위해서는 칼이 용광로 속에 들어가야 녹아지듯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되지 않고는 가정도 교회도 일터공동체도 민족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희생은 원수의 칼도 녹이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예수님은 증오와 이기심,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는 인류의 가슴을 갈아 엎고자 십자가 제단에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멘.

고려대, 총신대학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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