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때가 많다. 신앙이란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펴 놓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우리는 매일 살인사건을 언론을 통해 듣고 있다. 살인의 유형도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 동기는 아주 비슷하다. 탐욕, 시기심, 분노가 살인의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나온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살인의 동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고 동생의 제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기심과 분노가 살인의 동기가 되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가인에게 있었다. 먼저 네 마음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데, 가인은 회개의 기회를 버리고 살인을 선택했다.

변화산기도원마당

신앙은 반응이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중요하다. 수용할것인가? 아니면 거부할것인가? 말씀에 대한 수용 여부가 신앙의 질을 결정한다. 이것은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되며, 더 크게 보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

베드로가 성령충만 받고 오순절날 대중 설교를 했다. 너희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아주 직설적으로 전했다. 설교를 듣던 청중들이 반응하였다.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는 ‘회개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성령을 선물을 받으라‘고 전했다. 그 날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교했다. 영광의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이끌어내서 믿음의 조상 삼았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불순종하였던 것처럼, 너희들도 마찬가지이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는 의인을 잡아 죽인자요 살인자라.’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의 반응을 보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결국에는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다.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똑 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그런데 한쪽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고, 한쪽은 분노하여 사람을 살해했다. 말씀을 들었는데, 이같은 차이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을 들으면 반응을 한다. 복음에 대한 수용과 거부가 이런 차이를 주고 있다.

신앙이란 반응이다. 수용할것인가?거부할것인가? 어떤 신앙인들이 행복한 그리스도인일까?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하나님 제게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잘못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것 용서하여 주소서. 이제 더 좋은 제자 되겠습니다. 라고 늘 고백하며 사는 성도가 복된 그리스도인이다.

어떤 신앙인들이 가장 불행할까? 믿음의 권면을 듣거나 말씀을 들을 때 오히려 굉장히 기분나빠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그리스도인이다. 왜 이런 설교를 하지. 귀에 듣기도 좋은 것들이 많은데, 왜 심판을 설교하고, 저주를 설교하고, 지옥을 설교하고, 십자가를 설교하고 헌신과 순종을 설교하지. 귀만 듣기 좋은 설교는 오히려 성도들을 망치게 된다. 당뇨병 환자에게 계속해서 설탕만 먹이는 것과 같다.

영을 살리는 설교가 있고, 혼을 즐겁게 하는 설교가 있다. 혼만 즐겁게하면 그때뿐이다. 자라지 않는다. 육신의 열매만 맺는다. 힘들고 어려울때 신앙을 버린다. 짝퉁열매인 들포도 열매만 맺는다. 육적인 성도가 된다.

그러나 영을 살리는 설교는 극상품 열매를 맺는다. 자란다. 헌신과 순종의 기쁨과 능력을 알게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감을 기쁨으로 여긴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

오늘날 가인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가인은 책망을 듣고 오히려 동생을 살해했다. 이런 모습이 우리안에 있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는가 물었다. 가인의 대답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자니이까?’ 가인의 대답을 들으면서 우리는 생각한다. 가인의 태도가 아주 불량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물음앞에 가인의 태도가 심히 오만방자하다. 또한 가인의 마음이 심하게 구부러져있다는 것을 느낀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신문대표, 등저서: 주기도문연구 등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때가 많다. 신앙이란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펴 놓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인생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태도이다. 사람들은 아주 비슷하게 생각한다. 태도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이요 성품이다.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이다.

성경에 보면 엘리제사장의 자녀와 사무엘을 극명하게 비교하고 있다. 왜, 엘리 제사장 가문이 저주를 받았는가? 자녀들의 태도가 불량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엘리 자녀들을 이렇게 평가했다.“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런데 사무엘에 대한 성경의 표현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을 받았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가 좋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사무엘이 엘리제사장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왕, 사사,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 왜 그가 복을 받았을까? 어렸을 때부터 좋은 태도를 가꾸었기 때문이다.

언어의 태도, 감정의 태도, 얼굴의 태도, 행동의 태도가 인생을 결정한다. 삶의 태도가 인생을 좌우한다. 구부러진 마음으로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가인은 왜 인정받지 못했을까? 평상시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불량했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같다가 제사로 드린 것이다. 태도가 불량했기 때문에 동생도 죽이는 어쳐구니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리하고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오만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망가진 인격과 삶을 살고 있는가? 불량한 태도가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다.

교회마당에 달린 보리수 열매

하나님에 대한 태도, 교회에 대한 태도, 목회자와 성도에 대한 태도, 부모를 대하는 태도,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 일터에서 손님을 대하는 태도, 예배에 대한 태도, 공무원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하나 쌓여서 그의 인격이 되고 신앙이 되고 성품이 되고 인생이 되는 것이다. 좋은 태도를 가꾸는 것은 축복된 인생의 지름길이다. 구부러진 마음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뿐이다. 저주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을 아주 불편하게 한다. 곧게 펴진 마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과 평안함을 준다. 신앙이란 구부러진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곧게 펴는 것이다. 그 은혜가 공동체에 흘러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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