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1-4; 요한일서 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에게 슬픔은 원래 있지 않았습니다. 슬퍼할 수 있는 기능은 있었지만 슬퍼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와 저주가 사라진 새하늘과 새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사람들에게 슬픔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평생에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괴로움으로 인하여 애통합니다.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슬퍼하고 오해와 억울함 때문에 슬퍼합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슬퍼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물과 애통과 슬픔과 아픔은 인간들에게 죄가 있기 전에는 없었으며, 따라서 앞으로 죄와 저주가 사라지는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주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 눈물과 애통과 슬픔과 아픔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와 저주가 들어온 이래로 하나님은 모든 눈물과 사망과 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눈물과 사망과 애통은 사람들에게만 있지 않고 동물들에게도 허락되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1-22). 

하나님께서 이러한 눈물과 고통과 허무와 애통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의 때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롬 8:19). 

슬픔은 뭔가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오는 것이며, 고통과 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으로 오는 비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맛보는 가운데 궁극적인 영원한 고통과 영원한 애통을 미리 알고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또한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만일 첫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슬픔과 애통과 사망과 곡하는 것이 이 땅에 없었을 것입니다. 상실감과 절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탐욕으로 인한 불평과 질투와 미움과 전쟁과 살인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들은 비참과 절망과 멸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죄로 물든 인간들이 슬픔과 애통과 사망과 아픈 질병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대신에 더 많은 재물과 권력과 힘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죄로 인한 저주와 비참을 인간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심지어 마귀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과 대적하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죄악된 인간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자처하여 왔습니다.

지금도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기 보다는 가인과 같이 자기 성을 쌓고 있습니다. 더 높고 넓은 성을 쌓고 더 많은 재물과 힘을 쌓기 위해 무서운 죄악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픔과 절망과 사망을 대할 때 하나님을 저주하며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쥡니다. 그러나 그러할수록 그들의 영원한 멸망은 더욱 가까우며 그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여질 것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 땅의 죄로 인한 슬픔과 애통과 고통을 통해 택한 자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죄의 결과인 슬픔과 고통이 주께서 부르신 자들에게는 한 없는 은혜와 함께 주의 자비와 사랑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하면 십자가에서 주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할 때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니다. 이 땅에서 아플 때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땅에서 상실감과 절망을 느낄 때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의 허무함과 허망함을 깨닫고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 가운데 그들에게 임하는 위로는 무한합니다. 충만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눈물은 진주와 같은 영원한 기쁨으로 변화하고, 그 어떠한 상실 속에서도 영원한 선물을 붙들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슬픔과 좌절과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이 오시기 600여년 전에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3-4). 

이 예언 성취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고통과 멸망을 막아주시기 위해 친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잃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그러므로 십자가는 모든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담긴 최고의 고난이며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아픔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화목함이 이루어지고, 이에 그 안에서는 모든 슬픔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절망이 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안에서 죄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나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버림 받은 상태에서 또한 영원토록 버림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애통과 고통과 비참과 절망과 사망은 영원할 것이며 그 고통의 정도도 무한할 것입니다. 아! 그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 당할 영원한 상실과 절망과 고통과 애통을 생각할 때 참으로 불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들이 누리는 하늘의 평강과 감사와 지복과 만족은 이 땅의 그 어떤 슬픔과 애통과 죽음과 이별을 극복하게 하여주니, 얼마나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되는 지요. 더욱이 죽음 이후에,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누릴 완전한 평강과 풍요와 행복과 안식과 감사를 소망하면, 잠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설레며 그 소망 안에서 한없는 기대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난 성도들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의 섭리와 다스림을 이해하게 되면서 가치관과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이러할 경우, 수많은 슬픔과 걱정과 두통과 불편한 관계들이 회복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애통은 사람의 성격과 개성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것에 대해 별다른 아픔이나 수치나 비참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과 관계가 불편해지면 밤새 잠을 못 자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친구가 하나도 없이 혼자 지내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돈 문제에 관해서는 자나깨나 잠도 못 이루고 걱정하며 고통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각 사람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은 서로 다르며 아픔을 당하는 원인 역시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삶의 가치관이 바뀌면 과거에 그토록 고통을 주던 것들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 하나님과 깊은 교통 가운데 있으면 심지어 감옥에 갇혀도 기뻐하고 더욱이 사형이 선고되어도 천국이 더 가까워진 것을 확신하면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부인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탐욕이 사라짐으로써 돈이나 권력이나 직장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잃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애통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의지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저 하루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에서 주께서 주신 것으로 즐거워하며 주께 감사하며 충성할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호하십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1-34). 

그는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자신과 같은 흉악한 죄인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며 얼마든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독과 원한에 갇히는 일이 없으며 또한 언제나 미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심지어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뿐더러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지혜와 마음도 갖게 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0-21).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조금도 요동함이 없는 평안과 지복을 누릴 수 있으니, 어찌 세상의 것들과 일들로 고통과 애통과 슬픔을 당하겠습니까?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6-7, 11-13). 

둘째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염려와 고통은 사라질지라도 멸망하는 자들로 인한 안타까움과 슬픔과 애통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죄성 및 스스로 지은 죄악들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과 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한 슬픔은 더욱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고후 7:10-11).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가운데 더욱더 하나님의 아픔을 함께 느끼게 되고 눈물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의 전적 타락 및 이 세상의 덧없음을 더욱 확신하고 더욱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철저하게 살게 됩니다. 이제 어느새 그에게 임하는 슬픔과 고난마다 온유와 사랑,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더하는 과정이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지나되 그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주를 붙들고 나아갑니다. 그는 점차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아름다운 복음의 향기가 됩니다. 그들은 주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고난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영롱한 진주와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십자가 안에서 믿음을 붙든 주의 백성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의 마음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때, 억울한 불의를 당할 때,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믿던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배신 당하고 낙심할 때, 독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악착같이 자기 자신만  돌보게 되고 아무도 믿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을 저주하게 되면서 마음이 강퍅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과 분노와 애통을 피하기 위해 남은 삶을 다해 노력하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영원한 분노와 강퍅함 가운데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고난을 당하는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알아가면서 주와 동행하게 됩니다. 아픔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리어 그가 당한 아픔과 슬픔 때문에 고난 당한 자들의 친구와 위로자가 됩니다.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4-7)

이처럼 참된 신자는 고통 가운데 얻은 그리스도의 위로로 고통 당하는 다른 자들에게 찾아가 그리스도의 위로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를 베풂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후 2:15-16). 

그리고 또 감사한 것은 주 안에 있는 자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슬픔은 인내를 이루게 되면서 반드시 기쁨과 영광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0-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보혜사 성령으로써 누구든지 성령으로 충만하면 천국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떠한 근심과 슬픔 속에서도 성령 안에서 기쁨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7-18).  

이때 성령의 역사는 슬픔을 제거해 주시기도 하지만, 더더욱 큰 역사는 그 슬픔 자체가 즐거움을 낳는 과정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 믿음의 삶을 돌아보면,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슬펐던 때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과 슬픔 가운데 그리스도를 붙들면 그분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한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능력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며 이에 절망은 소망으로 바뀌고 손실은 다시 찾는 사건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가장 슬프고 힘들고 비참한 때에 가장 그리스도를 많이 만나서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악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많은 슬픔과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우리가 겪는 슬픔과 애통과 고난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즉, 믿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애통과 고난과 슬픔을 그리스도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는 채널로 삼으면서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나갈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이 세상에서 쾌락을 즐기는 자들이여! 롯의 아내처럼 아직 세상의 것들에 연연해하는 자들이여! 지옥불을 두려워하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에서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바울 역시 경고합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베드로 역시 당부합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2-3). 

솔로몬은 세상에 속한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미친 짓이요 헛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전 2:1-2). 

더 이상 늦기 전에 이 땅의 야망을 접고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붙들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 그리고 눈물은 도리어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영원하고 찬란한 보석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과거의 눈물이 나의 보석이 된 것을 알고는 주 예수님을 껴안고 영원한 찬송과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3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기뻐하는 것이요 행복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슬픔은 죄로 인해 들어온 것으로서 죄악에 처한 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사람은 기쁨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쁨을 추구하며 이에 지옥을 향하는 불신자라 할지라도 슬픔 가운데에서도 다시 일어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의 조건과 상황에 의존하는 일시적인 것이기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주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면 반드시 영원한 기쁨, 하늘의 기쁨, 원래 창조 때에 주어진 참된 기쁨을 다시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기쁨을 나누기 위함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3-4). 

디모데전서 1장 11절을 보면, 개역 개정으로 “복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원어로 (투 마카리우 쎄우)인데 “행복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창조물을 마치신 후에 하나님은 그 손으로 빚으신 피조물을 보며 기뻐하셨습니다. 행복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은 수고를 멈춘 상태를 의미하기보다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한 참 만족과 보람과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참으로 기쁨의 근원이시며 모든 만족과 보람과 행복의 원천이십니다.  

스바냐 3장 17절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시며 한없이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러므로 하나님은 행복과 기쁨을 피조물에게 주시기를 원하며 특히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후 자기 백성이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런데 이러한 기쁨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기뻐하라고 명한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지만,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지 네로 황제가 아닌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및 주변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조정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다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는 것은 그가 주를 믿을 때 주께서는 가장 선하고 유익한 일들을 완벽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바울은 깊은 로마 감옥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즉, 바울의 삶에는 결코 우연이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감옥에서든, 복음을 전할 때이든,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면서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감옥에든, 슬픈 때이든, 힘든 때이든, 모든 것을 초월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모든 성도들에게 ‘기뻐하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뻐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가능합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늘의 기쁨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또한 얼마 전 설교처럼 우리에게 죽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의 기쁨을 앗아가는 가장 큰 요인은 두려움과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과 걱정이 어디서 오는지 따라가보면 죽음입니다.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오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결국 나는 영원한 멸망과 저주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라는 깊은 잠재 의식 속의 우려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걱정을 가져오고 그런 상태에서는 결코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초월한 자들은 주께서 주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기쁨은 거룩함과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영혼 구원과 성장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게 됩니다. 거룩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양심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 죄악에 대해 넉넉하게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사랑의 섬김이 넘치는 삶은 영원한 만족과 함께 하늘의 기쁨이 차고 넘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의 기도와 작은 수고에 의해 멸망을 향하던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올 때 그 기쁨을 아십니까? 예수께서 한 영혼을 얻으실 때 하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그 기쁨을 아십니까?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6-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5:24, 32). 

동일한 기쁨을 바울이 표현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의 슬픔과 기쁨을 간략하게 다루어 보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늘 슬픔과 기쁨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또한 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의 슬픔과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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