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14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하나님의 궤 즉 언약궤는 성막 안에 있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the holy of holies)인 '지성소(the sanctuary)'에 보관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다. 성막과 성전의 가장 심장부인 지성소에 언약궤가 놓여졌다는 말은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언약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언약궤가 없는 성전이나 성막은 사실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의미가 없다.

여호수아 4장을 보면,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고 요단강을 건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먼저 요단강에 들어갔다. 언약궤가 요단강으로 들어가자 요단강은 양 옆으로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을 다 건널 수 있었고, 언약궤가 요단강에서 나와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육지를 밟는 순간, 요단강의 물이 처음처럼 다시 그들이 건넜던 땅을 덮어서 흘러 넘쳤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보다 앞서가셔서 문제(요단강물)를 해결해주시고 그곳에 머물러서 백성들이 그 문제를 뚫고 다 지나갈 때까지 문제의 중심에서 기다리다가 백성들이 안전해졌을 때에 다시 백성들 옆으로 와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상징한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이 나온다. 사무엘이 성전에 있을 때에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했다. 그때 이스라엘은 언약궤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왔지만, 전쟁에서 참패하고 제사장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우리는 때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언약궤는 하나의 모형일 뿐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에게 아버지가 핸드폰을 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이 핸드폰으로 연락해라"라고 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핸드폰을 항상 갖고 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핸드폰으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핸드폰을 통해 아이의 말을 듣고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그렇다면 핸드폰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일까? 아니다. 아버지가 해결해 준 것이다. 이처럼 언약궤가 예수님을 상징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따라서 언약궤를 의지하지 말고 언약궤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 곁에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을 보면, 십자가를 언약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십자가를 꼭 집에 달아놓아야 안심하기도 하고 교회에도 반드시 십자가가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 십자가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며,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도 아니며 십자가가 예수님도 아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생활을 할 때에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에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서 그것을 보는 이들을 살게했던 그 놋뱀을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섬기듯 그것에게 분향했기 때문에 그것을 부수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형상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다.

이스라엘로부터 언약궤를 빼앗아온 블레셋 사람들은 그 언약궤를 아스돗에 있는 그들의 신이 있는 다곤의 당에 함께 놔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와보니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다곤 신상을 세운 뒤에 그 다음날 가보니 이번에는 똑같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을 뿐만 아니라,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서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아있었다. 게다가 여호와의 궤가 있던 아스돗 지방에 독종의 재앙이 내려서 그곳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에그론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에그론 사람들은 이미 그 소식을 다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도 하나님의 재앙이 내렸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여호와의 궤를 꺼리며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여호와의 궤는 블레셋 지방에 7달 동안 있었는데, 그들이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보낼 때에는 새수레에 언약궤와 속건제로 금독종 5개와 금쥐 5개를 만들어서 함께 실어서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암소 두 마리가 끌게하여 이스라엘로 보냈다. 그 결과 이 두 마리의 암소는 곧장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갔다. 그런데 벧세메스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바람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을 죽이셨다.

그래서 벧세메스에 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궤를 가져가라고 해서 여호와의 궤는 이스라엘 기럇여아림에서 20년간이나 머무르게 된다.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오기 전까지 여호와의 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간 있었고 그곳에서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거룩히 잘 구별하여 지켰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계획을 세워서 아비나답의 집에서부터 새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새수레를 몰고가던 중에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날뛰었다. 언약궤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이동하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는데, 다윗은 이방사람들이 했던 방식으로 새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오도록 했다. 이렇게 세상 방식을 따라간 결과 언약궤가 떨어질까봐 붙잡던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그것을 가져가게 하여 석달을 그곳에 있게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자꾸 죽을 일이 생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경을 모르면서 공부하지도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세상 방식이나 가치관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뜻대로 살면서 죽을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한다. 법궤가 떨어질 것 같아서 붙잡았을 뿐인데, 즉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했는데 왜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 뜻대로 살았지, 언제 내가 하라는대로 순종하면서 살았느냐? 내 뜻이 뭔지 알긴 아느냐?", "너는 너의 의를 구하느라 애썼지, 언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했느냐?"라고 물어보신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있는 동안 아비나답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언급이 전혀 없는 반면,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동안 있는 동안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장들이 메고오도록 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옮기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을 볼 때에는 언약궤를 모셔오려고 하지 않던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하니까 당장에 언약궤를 모셔오려고 결심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원하고 벌을 받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복은 받고 싶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무관심 때문에 아비나답의 집이 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언약궤를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오도록 하므로 안전하게 언약궤를 모셔올 수 있었다. 그때 다윗은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때 그 기쁨을 기록한 것이 시편 24편이다.

"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원한 왕께서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원한 왕께서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 24:7-10)

[적용]

성막과 성전이 무엇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막이나 성전은 그 안에 언약궤가 있을 때에만 제 기능을 한다. 언약궤가 없는 성막이나 성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져서 언약궤를 빼앗긴 이후로 언약궤는 성막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막이 성막다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막에 있다고 할지라도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제사를 지내며 불량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그들 가운데 두지 못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언약궤가 머무는 곳마다 일어나는 현상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우상이 부서지기도 하고 독종의 재앙이 발생하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궁금해서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사람들이 단체로 죽기도 하며 만지면 안 되는 사람이 만졌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어느 곳에서는 온 집이 복을 받기도 했다. 왜 이렇게 같은 언약궤가 장소와 사람과 환경에 따라 언약궤를 통해 복이 임하기도 하고 저주가 임하기도 하는 것일까?

본문처럼 3개월동안 언약궤를 모셨던 오벧에돔의 집은 온 가족이 복을 받았다. 그런데 20년간이나 여호와의 궤를 모시고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은 초상집으로 변했다. 3개월 동안 여호와의 궤를 모신 것과 20년 동안 모신 것은 정말 비교가 안 된다. 그런데 20년을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어도 자녀가 죽게되는 재앙을 만나는 집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21절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경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을 성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이다. 따라서 성전인 크리스천 안에 언약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이며, 그 언약궤를 모시고는 있지만 우상을 섬기듯 방치되어 있는 것과 하나님의 법대로 그것을 다룬 것과는 이처럼 복과 재앙이라는 천지차이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20년 동안을 언약궤를 모시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저 그것을 귀하게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성경책을 귀하게 잘 보관하기만하고 그것을 읽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귀한 책이므로 아무 곳에나 두지 않고 잘 보관하기만 한다. 아비나답의 집에서는 언약궤를 그렇게 귀하고 거룩하게 보관했기 때문에 언약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어깨에 메고 가야할 언약궤를 자기들 생각에 좋은대로 새수레에 싣고갔던 것이고, 절대로 만지면 안되는 언약궤를 웃사가 열심을 다해 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정말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말씀을 전하거나 들어도 안되고, 들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말씀을 매일 읽고 듣고 묵상하며 전할지라도 그 말씀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즉 "~을 하면 복을 받고, ~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라는 법칙에 의하여 복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한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며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값없이 받지만, 복을 받는 것은 반드시 조건이 있다. "~을 하면"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우리는 복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따라서 행복하고 싶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모르거나 또는 해석을 잘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가까이 하면서 열심히 종교생활만 하기에 웃사와 그 외의 사람들 신약시대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즉 하나님의 경륜을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모든 가족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오벧에돔의 집처럼 모든 가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성령충만해야만 한다. 성령께서만 우리에게 성경을 밝히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기도 제목]

1) 혼과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2) 오늘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저희에게 성경 말씀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3)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 것 같은데, 성경에 무지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고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것보다 허무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성경을 대하게 하옵소서

4)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나 다르며 세상 방법이 훨씬 멋있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하고 멋지게 보일지라도 결코 세상을 따라가지 않도록 오늘도 저의 견고한 진들을 깨뜨려 주옵소서

5) 성경과 하나님을 제대로 몰라서 성경을 수백번씩 읽고 열심히 신앙생활과 봉사를 하며 말씀을 전파할지라도 그것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저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도구가 되지 말도록, 진정 성령안에서 거듭나게 해주시옵소서

6) 매사에 성령 안에서 생각하며 성령 안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행하게 하셔서 오벧 에돔의 집과 같은 복을 저와 저희 가정과 저희 교회가 받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7) 오늘도 주님의 얼굴을 저와 저희 가정과 교회를 향하셔서 주님의 뜻을 밝히 깨닫고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가운데 선한 열매를 맺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he 2nd Life Foundation / 뉴 욕 퀸 즈 교 회  /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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