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난 감격의 외침 “유레카”

박호용 교수┃대일고 1회, 연세대 철학과(B.A.), 장로회 신학대학원(M.Div.),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Th.M., Ph.D.) 졸업. 대전신학대학교 교수(구약학) 역임. 대전신학대학교 신대원장, 유라시아 선교회 회장 역임, 총회 파송(예장통합) 선교사[설교집]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부르다가 내가 죽을 노래》,《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예수사랑의 연가》,《감악산의 두 돌판: 요한복음서 강해설교》 [저서] 《야웨인지공식》,《폰 라드: 구원사의 신학》,《요한복음서 재발견》,《요한의 천재성: 상징코드》,《천하제일지서 요한복음》,《창세기 주석》,《출애굽기 주석》,《에스겔 주석》,《요한복음 주석》,《성경개관(한글판, 중국어판)》 와 역서 다수

예수를 만난 감격의 외침 “유레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보자 그를 따라가 유숙한 뒤에 예수께서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제자인 안드레는 곧장 자기 형인 시몬(베드로)을 찾아가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 1:41). 여기서 ‘만났다’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유레카(Eureka)’이다. ‘유레카’는 ‘구원(해방)의 감격’을 담은 전율과 감동의 외침이다. 필자는 ‘유레카’라는 말에 담긴 세 가지 뜻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만남’, 즉 ‘주님(예수님)과의 만남’, 둘째, ‘발견’, 즉 ‘진리(의미)에 대한 발견’, 셋째, ‘찾음’, 즉 ‘할 일(사명)에 대한 찾음’이 그것이다. 이를 하나씩 다시 부연설명을 해 보자.

순간의 존재가 영원한 존재를 만나는 ‘유레카’

첫째, ‘주님(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세 가지 만남을 잘해야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고 한다. 첫째는 평생 자신이 해야 할 직업(전공)이다. 둘째는 배우자이다.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결혼 상대인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궁극적으로 의지하고 소망하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그 무엇을 영원한 가치와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영원을 상실한, 즉 구원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행운아이고 참으로 복 된 사람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잡는 것으로 살아가던 어부 출신 요한이 메시아를 만났을 때, ‘유레카’를 외치며 감격하던 그 순간은 요한에게 있어서 시간이 영원과 만나는 순간이었고, 유한이 무한과 만나는 전율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요한의 일생에서 가장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일대일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순간이 있었기에 요한은 <요한복음>이라는 인류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하제일지서’를 쓸 수 있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된 수제자 베드로 또한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어떠한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한낱 구약 율법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인생을 180도 달라졌고,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되었다. 그 외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유레카’의 감격을 맛본 사람들이다.

무의미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유레카’

둘째, ‘진리(의미)에 대한 발견’이다.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의미(meaning)가 분명해야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히틀러 치하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경험한 빅터 프랭클(V. Frankl, 1905-97) 박사는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인생의 통찰을 얻었다. 그는 “사느냐 죽느냐는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어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삶의 무의미와 공허에 빠진 사람은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의미의 발견, 즉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요법)’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주었다.

한편, 의미의 문제는 보다 포괄적으로는 진리의 문제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단지 생존(生存)을 위해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진리의 문제로 고민하며 산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한 이도 있다. 인류 역사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문제로 씨름해 온 ‘진리 탐구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와 씨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실존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가 비중을 이용해 순금과 가짜 금속을 구별하는 방법(‘아르키메데스의 원리’)을 발견했다. 그는 진리를 발견한 순간 “유레카”를 외치면서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로 뛰쳐나가 춤을 추며 감격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생명보다 소중한 사명을 발견하는 ‘유레카’

셋째, ‘할 일(사명)을 찾음’이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일생을 두고 해야 할 일, 즉 사명을 찾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다. 그만큼 사명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눅 4:43; 막 1:38). 또한 바울은 그의 인생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밖에 없는 생명(목숨)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찾아 사는 일이라는 그런 고백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1813-55)는 22세의 나이에 이런 자각을 했다. “여태까지 나에게 부족한 것은 나는 무엇을 인식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자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내가 나의 사명을 이해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는 것이었다. 그 이념을 위해서 내가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 유레카! 이 답답한 시대에 모든 이들에게 유레카의 감격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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