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르트가 사용하는 Gottes Dreieinigkeit 어휘에 집중하고 있다. 교회교의학 1부에서 삼일신 부분을 제시했다. § 8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의 뿌리와 삼위일체의 흔적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을 준비시킨다고 제시했다. § 9 “삼중일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 10 “아버지 신”, § 11 “아들 신”, § 9 “영의 신”에서 설명하는 것은 <교회교의학 I/1>의 구성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사용하는 Gottes Dreieinigkeit 어휘를 “삼중일신”으로 번역하며 이해하고 있다. 영어로는 “The Triunity God”으로 번역했고, 박순경, 김재준은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우리 번역에서는 바르트의 Gottes Dreieinigkeit 어휘를 일관적으로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하지 않고 있음을 제시했다. <교회교의학> 1부 제목인 Der dreieinige Gott(The Triune God)는 번역도 쉽지 않다. 우리는 “삼중적 신”으로 번역을 제언한다. 박순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번역했다. 분명한 것은 Der dreieinige Gott가 삼위일체, Trinity 번역은 아니다. 영역에서 Trinity와 Triune God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한다. 특이하게 독한(獨韓) 사전에서는 “dreieinige”를 “삼위일체적”으로 번역했다. dreieinige은 drei(셋) + einig(성경 유일신)으로 어휘를 분석할 수 있다. 바르트는 셋과 하나가 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 필자는 바르트가 헤겔의 정반합의 이해 정진 구조를 따른다고 본다. 헤겔의 정반합의 구조를 “삼지성(Dreiheit)”으로 사용하고 있다. Dreiheit를 박순경은 “삼위성”으로 번역했는데 철학에서는 ‘삼지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에게 “복수 위격 개념”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바르트에게는 “삼중일위일신”이고, 우리는 이것은 “삼중일신”으로 개념화시키고 있다. 헤겔의 정반합(正反合, 독 These, Antithese, Synthese)을 삼중 개념으로 도입해서, 정에 아버지, 반에 아들을 합에 영(靈)을 구도화했다.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의 최종 결정은 “영”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구조는 “V권 성령론”까지 전개하려고 했다. <교회교의학> III권 창조론, IV 화해론, V권 성령론으로 구상화시킨 것이다. I권과 II권은 계시 이해라고 보았고, 이것을 우리는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 “계시일원주의”로 개념화하고 있다.

바르트가 § 9의 테제 문장에서 der Schrift를 사용했는데, 앞에서는 der heiligen Schrift을 사용했다. 영역(英譯, Scripture)이나 국역(國譯, 성서)에서는 차이 없이 동일어휘로 번역했다. 한국 교회는 바르트 신학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성경 이해에서 충돌했기 때문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에 성경 권위(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는 급격하게 몰락했다. 바르트를 통제할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방어책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 안에 범람하고 있다고 평가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칼 바르트가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자기 신관이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으로 전환시켰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것의 근거는 der Schrift(기록물)이다. 바르트가 히브리인의 기록물에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그런 수준이라면 북유럽 신화의 구전(Germanic mythology)에도 동등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오딘, 토르, 로키, 신단수(神壇樹)인 위그드라실가 있고, 그리스-로마 신화와 구조도 유사하다. 우리는 뒤에서 바르트의 Saga 개념도 논의해야 한다. 바르트는 성경으로 신화(Mtyh)로 보는 자유주의에서 사가(Saga)로 이해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현대신학에서 성경을 신화도 사가도 아닌 문학적 내러티브(narrative)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신화(myth)와 사가(saga)를 구분하는 것을 밝혀야 한다.

바르트는 기록물(der Schrift)에 근거해서 확실하게 “삼중성(in drei eigentümlichen)”을 선언했다. 그런데 칼빈은 “삼중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거부했다(Inst., I, 13, 2). 그런데 삼중성은 인류보편의식이다. 모든 종교와 인류 의식은 삼중성을 갖고 있다. 불교도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를 갖고 있으며, 동체삼보(同體三寶)라고 한다. 그리고 바르트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활용하는 중요한 어휘인 “존재양식(Seinsweisen, modes of being)”가 있다. 이 어휘는 바르트를 양태론(樣態論, modalism)으로 평가하는 중요한 어휘로 사용하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양태론이 아니라 “계시중심의 일신교”인데, “삼중성을 가진 일신교”이다. 양태론은 일신교를 기반으로 세 모습이 변화하는 것인데, 바르트의 일신교는 신의 모습이 변화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삼중성은 변화가 아닌 고유한 성격과 상호 관계가 변함이 없는 존재양식이다.

바르트는 세 존재양식(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존재한다”가 아니고, “기록물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수준을 유럽 신학에서 보수적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바르트 사후 5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 신학은 더욱 심각하게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주(der Herr)로 규정하고, 당신(das Du)로 세웠다. 그리고 인간적인 나(dem menschlichen Ich)를 양립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나를 병립시키는데 조건이 없고 해체될 수 없는 구도로 확립시킨다. 이것을 필자는 바르트가 임마누엘(Immanuel, God with us, 마 1:21-23)을 강조하는데, “죄인과 함께하는 임마누엘((Immanuel, with us sinners)”이라고 표현한 것과 연결한다(KD., I/1, 111. GG(국역 교회교의학) I/1, 150-151쪽, 고경태, “칼 발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비교 연구”, 총신대 박사논문, 2007, 171쪽). 이러한 구도는 바르트가 정통 기독교의 죄사함의 구도(서정)를 거부하고, 자연 인간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을 구도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의 견해를 정리하면,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존재양식이 계시 안에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주(Herr)이고 당신(Du)이고, 인간적인 나(Ich)와 해체할 수 없는 연합 관계이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세 존재양식이 계시 안에서 알 수 있는 한 하나님”은 “삼위일체께서 계시하는 신지식”과 같지 않다. 그리고 바르트가 하나님을 주로 제시한 것과 당신(Du)로 제시한 것을 수용할 수 없다. 나의 주(主)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을 나와 마주서는(partner) 2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받으실 주이시고 창조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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