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교회의 단결은 디아스포라교회의 동력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민족정기를 살리는 교회의 역사적 사명

세계의 구석구석마다 한민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 700만 해외동포의 애환을 그 누가 측량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재일교포, 재미교포, 중앙아시아에 뿔뿔이 흩어져 끈질긴 삶을 이어온 고려인들은 민족사의 뒷마당에서 한동안 잊힌 존재였다. 오사카에서 하와이, 미국의 본토에 이르기까지, 사할린에서 무르만스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생존하면서도 조선의 얼을 팔지 않았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건 정든 땅을 떠나 낯선 이국의 하늘 밑에서 땀과 눈물을 쏟으며 자식들을 키우고 삶의 터전을 일군 그들로 인해 오늘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거닌다.

20세기 초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이민 1세대 /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그들이 누구인가? 암울한 근대 한국의 운명을 제 짐처럼 떠맡아 독립을 위해 희생을 자처했던 밀알 같은 존재, 그들의 자랑스러운 후손이 아닌가? 그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멸시받는 이등국민으로 천대받을 때 매국노의 아들딸들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민족정신을 유린했다. 정신대 할머니들은 망국의 설움을 한 몸에 안고 살았다. 우리가 몇 백 년도 아닌 지난 세월의 수치를 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자립이 없으면 자존도 없다. 이제 세계사의 신작로에서 뜀박질을 시작했다면 걸음마를 익히던 그때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약소국가를 보듬고 작지만 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분골쇄신해야 한다. 교회는 대중이 외면해도 민족의 정기를 살리고 정신적 지주가 되기를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선교적 발판 삼아

전 세계 194개국에 흩어진 700만 한인 디아스포라의 저력은 대단하다. 고려인, 동포, 교포라는 이름으로 지구 곳곳에 뿌리내린 코리언들이 누구인가? 역사의 격랑에 떠밀려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들은 강대국들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희생양들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만주 벌판을 달리고 사탕수수밭에서 비지땀을 쏟았다. 정신대 할머니들은 약소국가의 조롱과 멸시를 전신으로 겪었다.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때 애국을 부르짖던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세계의 오지 어느 곳도 한국인이 스치지 않은 데가 없다.

이제 700만 디아스포라는 종말의 때에 세계 선교를 위한 잠재적 동력원이 되었다. 미국만 해도 정치, 경제, 교육계에 발군의 지도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내는 한인 2세, 3세들이 급증하는 추세다. 주지사도 나오고 총장도 나오고 대사도 나온다. 언젠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낯익은 코리언 이름을 볼 날도 결코 멀지 않았다. 기대와 달리 교회를 통한 국격의 높음이 무산되자 하나님은 한류열풍이라는 대체물로 한국의 선교적 사명을 독려하고 계시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비극이다. 몇 백 년도 아닌 과거의 아픔과 수치를 잊는다면 슬피 울며 땅을 칠 날이 머잖아 찾아들리라!

조국교회의 단결은 디아스포라교회의 선교의 동력

세계 각 지역에 산포된 디아스포라가 선교의 동력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려면 먼저 현지에서의 연합과 일치를 통한 결집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럴 때 횡적으로 대륙과 대양을 넘어 서로 연계되는 네트워크 형성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구호만의 일치와 연합은 백해무익하다. 교회역사를 보면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그에 못지않게 일치와 연합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치와 연합의 시기는 오래 가지 못하고 또 다시 분열과 갈등이 재연된 것이 교회의 지난 역사다. 왜일까? 마음을 터놓지 않은 구호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분열 또 분열하는 교회

민족통일이 어려운 것은 남한만 살펴보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나의 한민족이 하나를 이루기가 그토록 어렵다. 지도자와 대중, 질긴 학연과 지연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가로막는 원흉이다. 남북으로 갈린 세월도 억울한데 동서로 나뉘고 다시 동남, 동북, 서남, 서북으로 나뉜다. 정치적 단절에 이어 지방색으로부터 종친회에 이르기까지 갈리는 이유와 명분도 다양하다. 동창회도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기 짝이 없다. 유치원 동창회까지 등장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외국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 돕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향우회도 대단한 기세다. 호남 향우회, 충청향우회가 대세이고 경상향우회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호남향우회는 세계적인 규모로까지 조직되었으니 놀랄 일이다. 마치 고구려, 백제, 신라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원래 취지와 달리 끼리 끼리의 구도에 휘말려 주변과 껄끄러워진다면 이런 모임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4,500만 국민을 말할 것도 없다. 교회를 보라! 교단의 숫자만큼 갈린 것은 하나 되기를 꺼려 분산된 마음들이다. 하나를 이루기에 가장 쉽고 강력해야 할 교회공동체가 하나 되기를 거부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하나이신데 하나인 교회는 두셋으로도 부족해서 그 가지를 수백, 수천으로 뻗쳤다. 기독교의 경전은 66권의 다른 책들이 모여 한 권의 성경을 이루었는데 같은 본문을 보면서 전혀 딴 목소리를 낸다. 해석의 차이보다 무서운 것은 해석자의 관점이다. 해석의 틀이 다르니 같아 보일 리가 없다. 어제의 관점이 다르고 오늘의 틀이 같지 않아 서로 으르렁댄다. 차이나 다름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아예 틀림으로 규정하는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한 분열과 다툼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분열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치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파당의 패거리가 된다. 교회의 역사를 더럽힌 것은 일치를 나누고 분열을 정당화시킨 교권주의자들과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한 사이비 신학자들의 씻지 못할 과오다. 세를 형성한 그들 망나니들의 작태로 인해 한 하나님, 한 세례, 한 십자가, 한 소망, 한 믿음의 교회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고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뜻을 왜곡하며 불순종과 반역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사탄의 원기를 북돋아준 사실을 생각만 하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하나 됨은 주님의 소원이다.

교회의 거룩한 연합은 선교의 기반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의 대 명제 앞에서도 사람들은 정책에서 나누어지고 방법과 전략에서 나누어진다. 선교가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도시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어떤 경우에 처해도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성령의 주 무대가 선교현장이다. 또한 악령이 우글거리는 곳이 선교지다. 은혜가 더한 곳에 죄가 득세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똘똘 뭉친 사탄의 궤계와 술수를 이기려면 진실로 교회간의 유대와 협력이 성사되어야 한다. 네 일, 내 일이 따로 없다.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이 앞장서신다. 우리는 수종드는 자세로 그분 곁에 있으면 된다.

사탄과 협상으로 타결될 일은 전무하다. 혼합의 영을 철저히 배격하고 서로의 거룩함을 지켜 행해야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람이기를 지향하는 무리들이 대오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역사의 방향으로 행진해야 한다. 한 곳으로의 공간적 결집이 없어도 서로 있는 자리에서 기도로 연합이 가능하다. 필요하다면 국가 간의 교회 연합도 추구할 만하다. 조직적 관점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일치를 말함이다. 예를 들자면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협력이다. 중국교회의 저력은 대단하다.

영적 선봉에 서야 할 한국교회

한국교회가 그믐달이 되어 마지막 빛을 밝히고 있을 때 중국교회는 초승달의 빛을 뿌리며 선교의 선봉이 되려는 열망에 차 있다. 한국선교가 10만 선교사를 목표 삼을 때 그들은 100만 선교사를 선포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우리를 훨씬 앞질렀다. 그들의 열심과 순수 역시 우리보다 한 수 위다. 우리가 앞선 것은 고난 속에서 영글었던 믿음과 그로 인한 축복의 역사! 하지만 현실은 지난 역사를 회고하기에 너무 열악하다. 영적인 현실이 예전 같지 않다. 순교의 의지가 사라졌다. 헌신은 있어도 헌심(獻心)이 무디다.

한국교회의 이가봇 현상을 외쳐온 필자는 영광의 촛대가 중국교회의 처처마다 분수처럼 치솟아 오름을 본다. 한국교회에는 희망과 사명이 있다. 주님의 용사 되어 구름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무장시키는 일이다. 영적 교관이 되어 훈련병들을 강훈에 임하게 하듯 말씀과 기도에 올인한 절세의 고수들이 동굴에서 나와 영계의 무림을 평정해야 한다. 엘리야 시대에 칠천 인이 있었고 바울 시대에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비밀 병기는 세계 도처에 숨어 있다. 영적 전쟁의 선봉이기 원하면 지금 나서라!

디아스포라에서 슬픈 눈물과 힘겨운 노동을 극복한 한민족의 후예들은 벼랑 끝의 환경에서도 버텼다. 대단한 일을 성사시켜서가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코리언 스피릿으로 똘똘 뭉쳤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순결한 한 마리 사슴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사슴 곡조에 실린 비가(悲歌)처럼 슬퍼도 더없이 아름답다. 한때 이민이 봇물처럼 이 나라를 휩쓴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역이민이 대세를 이루었다. 경제적 이유가 아닌 신앙적 역이민이 기대된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던 일단의 무리처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황무한 이 땅의 처소마다 선대의 신앙 유훈을 지켜온 디아스포라 세대가 새벽이슬처럼 스며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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