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98) - 욥기(2)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부회장 KC대 전 총장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자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욥38:1-3).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이 욥기를 읽으면, 왜 고난이 자신에게 왔는지 알 수 있다. 무죄한 욥이 하나님께 항변하며 탄식하는 장면 속에서 그 고난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욥기의 그 말씀을 읽고 깨닫는 자에게는 발견된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된다. 정통신앙(신명기 신학)에 입장에서 친구 세 사람(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위로하기 위해 욥에게 찾아와서 회개하라고 촉구를 한다. 그들의 질문과 대답 속에서 욥은 자신의 정당성을 밝히며 고난의 문제를 토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욥기는 커다란 틀의 기본 이야기 구조보다도 세부적인 본문의 지혜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 그래서 욥기가 지혜문학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난의 지혜를 언급하지만 욥기 본문 하나, 하나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지혜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욥4:17, 엘리바스 첫 변론 부분).

욥기 이야기 끝부분에는 욥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며 포기하고 물러서지만 그 동안 욥의 대화 속에서 욥은 저항하고 불평하고 항변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이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기본 이야기 속에 처음 사용되고(욥1:6), 욥과의 대화 속에만 예외적으로 몇 번 나타나고 있고 또 아마 후기(後記)에 언급된다(욥38:1).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욥1:6).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 가니라”(욥1:9, 12). 욥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고난의 뒤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의 실체와 그의 이름을 계시하지 않고 대화를 진행하며 욥기를 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인간이 고난을 받기를 원하시지 않지만 사단의 궤계와 음모 속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의 고난이 진행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화는 엘과 엘로아(하나님)와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로서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선호한다. 이러한 신명의 차이는 이 이야기와 시가 한 명의 동일한 저자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쉬미트).

욥기의 저작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한가. 욥기 이야기는 분명히 이미 구전(口傳)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 형태에서 단순한 “개인적인 전설(saga)”로서 욥기를 간주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오히려 욥기는 “교훈적인 지혜 이야기”형태로서 운율적 산문으로 기록된 것이다(뮐러). 욥의 인물이 미덕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토론하는데 사용되고, 보다 정확히 인간이 고통받은 시간에 대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행동을 말하는데 이용된다. 그러나 욥의 이야기와 시는 단순히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오히려 시가 이야기에 전제된다. 욥의 전설은 이전에 독립적인 이야기 전체로서 전승되었다. 이 독립된 이야기는 후에 대화체 이야기로서 된 기본 이야기(frame story)였다. 이 전승 과정에서 몇 가지 수정이 이뤄졌다. 그 수정된 것은 편집과정에서 논란의 문제가 된다. 여기서 시 부분에 대한 구절을 보자.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욥8:4). 시가 산문의 구조를 이끄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빌닷의 공격 속에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욥의 거룩성과 경건은 역으로 자녀의 죄를 살필 수 있는 신앙의 단계를 가졌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욥기는 인간이 고통 속에 반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고뇌하는 인간의 실존을 살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 찌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9:3). 자신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경외가 담겨 있는 모습을 본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 구나”(욥9:17-18).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찾으시면 어떠한 영적인 죄라도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죄인으로 정죄되리라는 고백을 한다. 결국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만 의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고통 받고 고난 받기에 힘든 인간의 상황을 보여주며 탄식하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 찐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 찌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 하리이다”(욥9:28-31). 욥기의 시와 산문, 기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고난 중에 있는 실존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귀는 복이 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귀가 복이 있도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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