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왕국의 정원 같은 조국교회를 꿈꾸며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재도 결국 묻혀버리는 슬픈 조국

하나님이 역사적인 천재 6명을 한국 땅에 한꺼번에 보냈다. 그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뉴턴은 새로운 과학이론을 발표했지만 건방지고 선배를 무시한다 하여 왕따 당했다. 고심 끝에 진로를 바꾼 뉴턴은 강남의 잘 나가는 학원 강사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 밖에 몰라서 내신 성적에 걸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자 중국 식당에서 자장면 배달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갈릴레오는 주체사상 연구원이 되었고, 연구하면 할수록 주체사상은 허구임을 깨달았다. 이를 눈치 챈 당국이 그를 자아비판의 자리에 세우자 자기 신념과는 달리 주체사상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내려오면서 “그래도 주체사상은 허구!”라고 했다가 아오지 탄광으로 끌러가고 말았다. 에디슨은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으나 각종 규제와 급행료에 질려 보따리 장사로 떠돌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하나님도 지금 그를 찾고 있는 중이다. 퀴리 부인은 라듐을 발견해서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았지만 얼굴이 받쳐주지 않아 쓰이지 못하자 특유의 근면성을 살려 지금은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재주는 비상하지만 장애인이었던 호킹 박사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음을 개탄하던 중에 잠시 서울시내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조직의 폐쇄성, 경직된 교육제도, 이념이 진실을 옭죄는 현실, 행정의 비효율성과 부패상, 얼짱이 환영받는 미모지상주의, 장애인이 죄인이 되는 나라, 이것이 지금 조국의 현주소다. 학연, 지연, 혈연의 질긴 끈에 동여매여 하나 되기는 어렵고 나누어지기는 쉬운 우리다. 앞서면 내리누르고 뒤처지면 비아냥댄다. 인간관계의 암세포 같은 붕당이기주의는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폭거가 아닐 수 없다. 근시안적인 교육정책으로 인해 골병드는 것은 아이들이요 휘청거리는 것은 부모다. 전 국민이 오피스텔 청약 사태처럼 변덕 열풍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

웰빙(well-being)만이 아니라 웰두잉(well-doing)에 관심을

올바른 민족교육이 지금도 시급하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관공서나 행정부처의 문턱은 높기만 하고, 근무자들의 고압적인 자세도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최고 통치자로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공복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겉모양에 치중하여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뜯어고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성형수술비가 연간 3억불에 이르고 맞춤형 성형이 기승을 부린다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세대에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성형외과의 일 년 수입이 최고에서 최저로 떨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처럼 동정적인 민족도 드물 것이다. 해외의 재난에 대해 관심을 표하고, 수해나 지진을 당했을 때 보여주는 국민의 참여는 가히 감동적이다. 문제는 이것이 매스컴의 영향으로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일시적 현상이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장애인은 평생을 고통과 불편 속에 지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나 정부 차원에서의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확충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천재와 둔재가 섞여 잘 살 수 있는 나라, 웰빙(well-being)만이 아니라 웰두잉(well-doing)에 관심을 갖는 그런 사회이기를 학수고대한다.

누군가에게는 에덴, 누군가에게는 애굽, 누군가에게는 소돔 같은 조국

한국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같던 소돔의 현대판이다. 모든 편의시설이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다. 시골 공중화장실의 청결도는 세계 최고다. 찜질방 수준은 당분간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할 만큼 첨단에 세밀함까지 더했다. 좁은 땅덩어리지만 찜질방을 보면 이 나라가 결코 작은 덩치가 아님을 느낀다. 대개의 찜질방에 들어서면 우선 그 넓이부터 놀라게 된다. 음식의 다양함과 맛의 오묘함은 가히 예술적이다. 전자 담배가 15,000가지 맛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는 맛 집이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IT기술력에 힘입어 웬만한 노인들도 핸드폰 다루는 기술이 수준급이다. 반도체 기술과 생산 능력도 세계1위고 이혼율과 양주 소비율까지 늘 상위권을 유지한다. 후자의 두 경우도 살기 어려워서라기보다 너무 살기 넉넉한 이유가 더 강할 것이다. 양궁과 쇼트트랙은 세계인의 부럼을 살 정도로 초절정의 상태다. 경제력도 만만치 않고 세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의 저력도 아직까지 건재하다. 못살기로 유명했던 소위 달동네들도 이제는 정부의 과감한 지원으로 사람 살만한 동네로 바뀐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의인들과 선인들이 있어 아직은 사람 살만한 곳이라 불리는 조국은 과연 살기 좋은 곳이다. 지상낙원은 아니어도 지옥은 결코 아니다.

조국이 정말 사람 살만한 곳인가? 이렇게 되물어보는 것은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에 하직을 고하는 자살자들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고수한 현실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노숙자들이 불편한 잠을 이어가며 세 끼 밥을 걱정하면서도 질긴 목숨을 이어가는데, 얼마든지 살 만한 환경에서 살아갈 이유가 충분한 사람들이 세상을 하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런 것일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조국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면 단 한 번이라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상위권에 한두 번은 랭크되었어야 옳다. 백인이 흑인을 냉대했던 역사를 배우며 울분을 토하고 공분하면서 이 땅에서 땀 흘려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한국인의 심리가 참으로 묘하다. 피부 색깔에 따라 차별의 정도를 달리 하니 기가 막힌다.

우리도 한 때는 난민이며 외노자임을 기억

한국인은 전형적인 외국인 혐오증(xenophobic syndrome)에 갇혀 산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중동의 열사에서 땀 흘려 일하던 때가 그리 멀지 않은데 실로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개구리가 우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고 동남아인과 탈북자를 다루는 자세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제주도 예멘 불법 난민들에 대한 찬반 집회가 한동안 매스컴을 후끈 달구었다. 2012년에 제정된 난민법에 따라 예멘인들이 한 달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로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하였다. 심사기간 동안 체류할 수 있음에 따라 이를 악용되는 사례들과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제주도민의 반대 여론이 상승하면서 인도주의적 대응을 주장하는 이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조국이 사람 살 만한 곳이라면 무엇보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 자세는 속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 내 나라를 찾은 이들을 극진히 대하는 것은 국가적 예에 속한다. 우리 자신이 외국에 나가 환대나 홀대 받은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환대 받고 사람 향기 나는 조국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교회 숫자는 늘어났는데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능욕을 당한다. 민족의 여명기에 교회의 힘은 미미했으나 나라와 민족의 진로를 밝히는 등불 노릇을 잘 감당했다. 지금 교회의 힘은 막강해졌지만 나라의 진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 전체 교회의 1/20에 해당하는 약 3,000교회가 매년 문을 닫는다고 한다. 원인과 이유를 분석하여 단속한다 하지만 너무 대처가 늦었다. 어느 정도 속도를 줄이기는 하겠지만 한 번 급경사를 타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추락은 예상보다 길게 이어질 것이다. 조국이 사람 살 만한 곳이 되려면 무엇보다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해서는 안 된다.

산천이 보호되고 강산이 편안한 나라,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남북이 다채롭게 소통을 이어가는 나라, 죄다 대통령이 되기 싫어해서 국민이 등 떠밀어 하는 수없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 감옥소가 파리를 날리고 경찰들이 이직을 신청하는 나라, 술집들이 파산신청을 하고 도둑이나 강도가 창피해하는 나라. 국외 입양이 줄고 국내 입양이 증가하는 나라, 고아원이 줄어들고 홈리스들이 사라져 역사의 기록물로 남는 나라, 구직자가 드물어 구인난에 회사가 진땀 빼는 나라, 교통 법규의 철저한 준칙으로 관련 법규가 아예 삭제되고 보험회사가 신상품을 고민해야 하는 나라,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저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나라. 이런 나라는 다만 몽상에 불과할까?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나라는 욕심일까? 이런 나라가 지상에 출현할 것을 굳게 믿는다.

메시아 왕국의 정원 같은 조국교회

성경이 제시하는 메시아 왕국은 앞에서 언급한 모습의 나라를 능가한다. 조국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변모되어가는 중에 필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전히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꿈꾼다. 이것은 나의 신앙이요 갈망이며 희구다. 먼 후대에 일어날 일인 동시에 생전에도 가능한 이 나라를 마음에 새겼기에 조국의 현실이 어떻든 개의치 않는다. 상대적으로 북한의 동포들은 남한보다 열악한 삶의 환경에서 지낸다. 남북의 훈풍이 북한 주민들에게까지 배어들기를 희망한다.

통일이 되어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고 삶의 질이 모든 면에서 개선되어 모두가 더불어 행복을 느끼게 되길 빈다. 그전이라도 탈북자들의 시린 마음들이 이미 녹아들었기를 빈다. 조국의 교회들이 메시아 왕국의 정원 역할하기를 기대한다. 지치고 곤한 영혼들이 찾아와 쉼을 얻을 수 있는 곳, 신기루를 좇느라 지친 삶들이 오아시스의 생수로 해갈할 수 있는 곳, 1천 개의 감각이 살아나기 이전이라도 단 오감을 지나 육감을 건너 칠감의 감각으로 교회를 느끼고 싶다. 너와 내가 다툼 없이 넉넉히 보듬고 서로에게 따사로운 웃음 건네며, 욕심도 근심도 뒤로 한 채 일상의 행복을 수놓아가는 그런 나라를 어지럽게 돌아가는 한반도의 회전판 위에서 감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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