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뉴얼,‘한국교회 희망이야기’(12)

 

이대희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10년)를 역임했다, 학술원 교수 강의와 전국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크리스천 가이드> <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동부구치소 재소자 성경공부와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 중국목회자 훈련사역과 북한선교 지도자 훈련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200여권의 이야기대화식 성경교재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50여권의 저서( “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올해의 책 선정).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하브루타 연구소장. 미국 Kernel niversity Korea Campus 국제 객원교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모세오경인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5권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본래 히브리어 성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같은 책 제목이 없다. 이것은 후대 70인 역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독자들의 편리를 위하여 붙인 각권 제목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모세오경이 5권인 줄 착각을 한다. 사실은 한권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성경 두루마리는 나눌 수 없는 통으로 된 책이다. 그것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하나로 연결하여 이야기식으로 읽는 책이 성경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헤브라이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한권으로 연결된 유기적인 책이다. 성경은 인격과 생명이기에 어느 하나도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요한계시록은 성경을 읽기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그런데 왜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은 서로 각권 중심으로 되었는가? 왜 구약과 신약이 분리된 책으로 이해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신학의 영향이 크다. 본래 성경은 한권인데 신학이 성경을 나누어 구분하여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한권으로 보기 보다는 66권의 책으로 선택하는 책으로 오해했다. 그러다 보니 요한계시록만 보면 모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권의 책을 강조하는 잘못된 경향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주로 이단들이 사용하는 성경읽기 방법들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의 이런 잘못된 신학적 구성의 형태를 취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19세기 초 F.D.E .슐라이어마허가 제기한 ‘신학 연구 소개요’ (Brief Outline of the study of Theology.(1811))에 근거한다. 신학에는 삼대요소로 철학적 신학 (기독교 정수를 확인함), 역사신학(현재적 상황과 요구를 이해하기 위한 교회역사를 다룸) 실천 신학 (교회의 지도권과 실제의 기술과 관계함)이 있다고 제기했다.

이때부터 신학의 과목은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신학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 이후에 독일 신학자 Philipp Gabler (1753-1826)의 조직신학에서 성경신학을 분리하였다. 이렇게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이 나누어진 후에 성경신학 내에서는 다시 신약신학과 구약신학이 나누어지고, 신약신학 내에서는 복음서신학과 바울신학으로 나누어지고, 복음서신학 내에서는 공관복음신학과 요한복음신학이 나누어지고 공관복음신학에서는 마태신학, 마가신학, 누가신학등이 나누어지고, 마태신학에서는 언어의 신학과 행동의 신학이 나누어지며, 결국 언어의 신학에서도 설교의 신학과 논쟁의 신학 등으로 나누어지는 방식이 발전 되어 왔다. 우리는 신학의 교육의 구조를 이해할 때 한번 정해진 슐라이어 마허와 Gabler의 견해에 종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조병수, 21세기 신학교육, http://gensdei.org/profile/essays/theoeducation.htm.)

이런 상황은 나중에 미국으로 넘어 오면서 신학이 다양하게 발달 하게 되었다. 특히 세속주의와 다원주의가 서구 특히 북미에 영향을 주면서 신학은 전체의 종교의 한 부분으로서 연구가 되는 현상이 생겼다.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에 하나로 접근하는 형태가 생기면서 점차 성경 자체 보다는 종교적인 체계로서 신학 교육이 행해지게 되었다. 학문의 명칭을 말할 때 ‘성경’이라는 수식어 보다는 ‘기독교’라는 말을 더 선호하였다. 예를 들면‘기독교 교육...기독교 상담’등이다. 유명한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는 “종교교육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대한 신앙 보다는 일반적인 종교적 가치관을 촉진 시키게 되었다”고 지적한데서 신학의 방향이 성경을 떠나 종교적인 가치관으로 이론화, 체계화 되는 상황이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이런 분리 작업은 조직신학에도 그대로 이어져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성서신학처럼 계속 과목이 나누고 있는 실정이다. 신론, 죄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성령론 등 그 가지는 계속 번져 나가고 있다. 조직신학에서 다시 기독교라는 호칭을 붙여 독자적인 학문으로 분리하여 나온 것이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문화, 기독교 영성학 등이다. 이것은 역사신학과 실천 신학에서도 분리적인 경향은 그대로 나타나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현대교회사, 종교개혁사, 기독교 상담, 기독교 교육 등의 과목이 형성 되어 왔다. 앞으로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이런 나눔과 분리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 신학교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과목의 틀인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구조의 형성은 이런 과정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그대로 영향을 받고 있다

성경은 한권의 책이다. 어느 한권을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인본주의가 들어간 증거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조차도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는 오류를 범했다. 성경학 박사학위 과정을 보면 성경 중에 어느 한 책을 그 중에서도 어느 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외국에 유학하여 10여 년을 연구하여 어렵게 학위를 받는다. 왜 이렇게 하는가? 때로는 오히려 그 시간에 그 열정을 성경전체를 통으로 연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학문적 기여측면 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성경을 어느 한 부분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보면 자칫 학위와 지식적 교만에 이를 수 있고 오히려 삶의 변화와 거리가 생길 수 있다.

과연 성경을 그렇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핵심일까? 그것이 성경을 주신 이유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어쩌면 성경조차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조직신학적 사고의 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성경을 공부하여 예수를 만나 자신을 죽이는 연구가 아닌 오히려 학위를 받기 위한 성경연구가 된다면 이것은 슬픈 일이다. 자칫 성경의 어느 한 책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것이 목표가 된다면 오히려 성경의 본래 정신을 벗어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한 분야를 평생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빚을 지고 있고 이렇게 성경이 바르게 읽는데 기여한 점이 크다.

성경을 한부분에 집중 연구하여 학위를 받은 것은 사실 시작에 불과하다. 전공에 머물지 말고 평생 동안 그런 방식으로 성경 전권을 한권으로 연구하라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것이다. 지금부터 성경을 통으로 공부하면서 결국은 말씀에 목숨을 던지는 사람으로서 사는데 그 목표가 있다. 만약 성경을 어느 한권만 공부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이제 성경을 그만 공부해도 된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자랑에 이르기 쉽다. 하지만 성경을 전체를 한권으로 보면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 누구도 성경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겸손하게 되며 성경공부를 멈출 수 없다. 평생 동안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말씀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 예수로 사는 제자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고 공부하지 않고 멈추어 있다면 혹시 나도 이런 부류는 아닌지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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