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를 꿈꾸는 인류 그리고 코리언 파라다이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파라다이스는 풍족함이 아닌 만족함

인류는 이상향을 늘 그린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처럼 이상향을 그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해당한다. 러시아의 악마적 유토피아를 벗어난 베르자예프(N. Berdyaev)는 유토피아를 모든 인간이 본래 지닌 의식이라 보았다. 인류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이상향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를 대변한다. 종교, 신화, 문학, 사상,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마다 이상향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다. 파라다이스는 모두가 동경하는 세상, 상상과 꿈의 세계, 별천지, 지상낙원, 이상적인 고향으로서의 낙원이다. 이상향이 비뚤어지면 이상한 고향이 되어버린다.

이상향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귀천을 떠나 누구라도 갈망할 수 있는 마음의 염원이다. 이상향이란 풍족함의 상태라기보다 자족함을 이룬 상태로 봄이 옳다. 어떤 사람은 천하를 손아귀에 거머쥐고도 배고파한다. 그 속에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황금의 땅인 엘도라도(El Dorado)를 찾아 죽음의 항해를 떠났으나 실패하고 살육의 흔적만 남겼다. 중세의 아랍인들에게는 황금이 지천으로 깔린 신라가 이상향이었다.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의 이상향은 어디에도 없다.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도 천자의 자리를 우습게 여기고 자족함을 누리면 그는 이상향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향(異狀鄕)과 이상향(理想鄕)의 유토피아

역사상 시험을 거친 여러 철학 사조와 이데올로기는 유사 이상향과 사이비 이상향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를 뼈아픈 기억으로 가슴 속에 되새겨준다. 마르크스가 꿈꿨던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상향이었고 역사가 증명하듯 실패로 끝났다. 아직도 실험 과정에 있다고 주장할 공산주의자가 있겠지만 역사의 종말을 내다보는 이 시기에서 듣기엔 너무 느슨한 답변이다.

유토피아란 “유”와 “토포스”의 합성어인데 “유”(ou)와 “”유“(eu) 둘 중 어떻게 연관되느냐에 따라 “아무 곳에도 없는 곳”(ou+topia)도 되고 “좋은 곳”(eu+topia)도 된다. 유토피아는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에 이상한 곳(異狀鄕)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理想鄕)인 셈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소설은 토마스 모어의 작품인데 그 배경에 16세기 영국 사회가 있다. 11세기에 영국에서 형성된 봉건제도는 13세기까지 절정을 이루지만 십자군 원정 실패로 14세기부터 위축되어 16세기에 이르러 봉건제도는 허물어지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태동하였다.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하자 모어는 공산적 평등 사회인 ‘유토피아’를 그려냈다. 16세기 프랑스의 라블레(F. Rabelais)도 연작소설 <가르강튀아와 판타그루엘>(Gargantua and Pantagruel) 제1서인 <가르강튀아> 말미에서 텔렘 수도원(Abbey of Thelema)을 유토피아로 그렸다.

이상향(理想鄕)을 꿈꾸던 인류 역사

전설 속의 이상향은 고달픈 현실에 붙들려 사는 인간에겐 희망이었고 피난처 역할을 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인류의 잃어버린 이상향인 전설의 섬 아틀란티스(Atlantis)를 언급하였다. 아르카디아(Arcadia)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고대 지역으로 후세에 목자의 낙원으로 전승되어 이상향의 대명사가 되었다. 북구 신화에 등장하는 발할라(Valhalla)는 게르만 민족의 신 오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마련한 이상적 장소였다.

영국의 아더왕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옮겨졌다고 알려진 아발론(Avalon)은 영국 어딘가에 있는 전설의 섬이다. 파라다이스의 원형이라 간주되는 수메르인의 점토판 문서에는 인류의 이상향이 딜문(Dilmun)이라 소개되었다. 지복의 상태를 뜻하는 엘리지엄(Elysium)은 헬라의 시인 헤시오드(Hesiod)에 의하면 지구 끝의 서쪽 대양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호머(Homer) 역시 낙원으로 묘사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과학과 문명이 지배하는 이상국가요, 프랜시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는 과학자가 지배하는 이상국가요,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Civitas Solis)는 사제가 지배하는 이상국가요, 플라톤의 <국가>(Politeia)는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국가이지만 엘리트가 비엘리트 계층을 지배하고 갑이 을을 지배하며 알파가 감마, 델타, 입실론 위에 군림하는 지배와 피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 감싸졌기에 결코 인류의 이상향이 아니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한 샹그릴라는 티베트에서 전래된 신비 왕국 샴발라(Shambhala, 香巴拉)에 기초되었으며 히말라야의 파라다이스로 알려졌다. 샹그릴라는 1997년 중국 정부에 의해 윈난성(雲南省) 디칭 티베트족 자치주의 중띠엔(中甸)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2001년부터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개명되었다. 또한 자나두(Xanadu)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이 지은 전설적 누각으로 속세를 떠난 평화의 곳으로 상징되었다.

불교와 유교가 말하는 ‘서방정토(西方淨土)’와 ‘대동(大同)’

불교의 이상향은 매우 구체적이다. 현세의 중생들은 예토(穢土) 곧 불결한 땅인 이승에 살면서 정토(淨土) 곧 극락을 지향한다. 극락(極樂)은 말 그대로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라 불리기도 한다.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 공간인 이런 이름들은 피안(彼岸)이란 한 마디로 축약될 수 있고, 인간이 추구할 궁극적 이상적 상태는 니르바나(涅槃)로 이해할 수 있다.

유교의 이상향인 대동(大同)은 만인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궁극적인 이상 사회로서 차별을 두지 않고 동화하여 천지만물과 인간 상호간 일체됨을 뜻한다. 정치는 개인이 아닌 공익을 위해 행해지므로(天下爲公) 천하는 크게 평화롭다(天下泰平). 유교의 아름다운 이상사회는 춘추전국 시대 이후 한 번도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고 조선의 설계사 정도전은 유교적 이상국을 펼치기도 전에 정적 이방원에게 참살 당했다. 조선 중기의 개혁가 조광조도 도덕국가의 이상향을 펼치려다 사사(賜死)되었다. 대동사회가 사회주의의 이상 사회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주장도 있지만 글쎄다.

기독교의 이상향은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내 사라진 에덴동산이며 종말의 때에 다시 찾은 낙원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민족에게는 가나안이 이상향이었고 민족 이스라엘에게는 메시아 왕국이 이상향이었다. 천년왕국(Millenium)은 모든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의 한 실체로 작용했으며 회복된 에덴으로서 메시와 왕국과 일치한다. 실낙원과 복락원 사이에 인류 역사가 진행되고 모든 이상향의 완성으로서 천국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코리언 파라다이스는 어디 있을까?

중국은 그 거대한 땅덩이만큼 경관이 워낙 뛰어나 시인, 화가, 학자들에 의해 이상향으로 묘사되거나 그려진 곳이 많다. 도연명의 도원향(桃源鄕) 혹은 무릉도원(武陵桃源), 왕연의 별장인 망천장((輞川莊),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절경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소상팔경(瀟湘八景) 등은 아시아권에서 널리 알려진 이상향들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동부 지역에 위치한 부탄 왕국은 현실 세계에서 이상향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교통 신호등이 없고 국민총생산보다 국민총행복을 으뜸시하는 부탄은 가난 속에서 풍요를 즐기는 매우 신비한 나라로 알려졌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이상향을 줄기차게 추구해왔다. 고려의 민중들이 노래하며 그렸던 청산(靑山)은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된 불변의 파라다이스였다. 조선 민중은 무력한 왕과 권신들의 농단에 비참한 삶을 이어갔지만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율도의 이상국을 한 줄기 빛으로 비춰주었다. 이청준의 <이어도> 역시 사라지지 않는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늘 거기 있는 섬, 섬을 본 사람은 누구나 떠났기에 섬이 있다고 증언할 사람이 전혀 없는 섬, 한 번 가면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섬, 그래서 신비의 베일에 꼭꼭 가려져 제주도민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승되어온 온 자그만 암초에 얽힌 이어도의 전설은 차라리 피안의 큰 섬이요 피안의 안식처요 마음의 고향이며 아무도 보지 못해서 더욱 탐라의 파라다이스였다.

정감록에서는 난리에도 안전하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전염병이 없어 세 가지 재앙(三災)에서 보호될 수 있는 곳으로 십승지(十勝地)를 예언했다. 경상도에 네 곳, 전라도에 세 곳, 충청도에 두 곳, 강원도에 한 곳을 언급했다. 이상향인 셈인데 16세기 이후부터 조선 민중의 넋을 빼앗으며 그들 삶에서 현실적 이상향으로 자리매김했다. 푸른 학이 노닐고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기거하던 지리산 자락의 청학동은 예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의 이상향으로 전해진다. 과연 코리언 파라다이스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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