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복지의 선구자, 한센인의 아버지, 빛고을의 아버지, 무등산의 거인


전라남도 광주, 지금의 광주광역시는 사실 대표적인 한국의 기독교 도시이다. 1970년대 광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금남로에 있는 광주중앙교회(9층)였다. 옛부터 광주에는 교회가 많았고 광주시 양림동에는 선교사 마을과 기독병원, 수피아여중고, 숭일중고등학교, 호남신학대학, 그리고 같은 이름의 수많은 양림교회가 한동네 한거리에 존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에는 수년 전에 만들어진 오방로도 있다.

20세기의 성자, 오방 최흥종 목사

필자는 광주(光州)를 “빛고을 성지”라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이 배출한 20세기의 성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방 최흥종 목사와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두 분을 말하고 싶다. 감신대학교 이덕주 교수도 오방선생을 <무등산 자락의 성자>로 정의하였다. 그런데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崔興琮, 1880∼1966) 와 그의 양아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은 모두 광주와 인연이 깊은 분들이다. 특히 이현필 선생은 광주 출신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오방이 세운 고아원인 동광원이 지금은 사회복지법인 귀일원과 소화자매원 등으로 광주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한국에서 유일한 개신교수도공동체 동광원의 수도자 대부분이 광주호남출신이었다. 두 분 모두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함으로써 전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광주출신 최초의 교인이자, 최초의 장로이자, 최초의 목사였던 최흥종 목사는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하였다. 오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오방은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으로, 첫째 가사로부터의 해방, 둘째 사회로부터 해방, 셋째 경제로부터 해방, 넷째 정치로부터 해방, 다섯째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즉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다섯 가지의 생활신조를 말함이다.

오방이란?

첫째 : 가사에 방만 - 가족에 대하여는방만함을 버리고

둘째 : 사회에 방일 - 사회에 대해서는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셋째 : 경제에 방종 - 경제적으로는 물질에 예속되는 것을 버리고

넷째 : 정치에 방기 - 정치에서는 무관심과 무책임함을 버리고

다섯째: 종교에 방랑 - 종교에서는 신조 없이 옮겨다니는 것을 버린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의 장로교 목사였고, 광주의 대표적 교회인 광주중앙교회 초대당회장이자 3대 당회장으로 담임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라노회 노회장도 역임한 분이다. 그러나 가정·사회·경제·정치에 매이지 않고, 더 나아가서 기성 교회의 제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나 자신만의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어지러웠던 시대에 등불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1935년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전라노회를 탈퇴 한 후 최흥종 목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팔아버리는 기성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게 “너희 회칠한 무덤들아, 너희들은 죽었다”,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었다. 회개하라”는 내용의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교단으로부터 제명되지는 않았지만, 오갈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할 상대도 많지 않았다.

특히 최흥종  꾸짖기 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목회자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고 평신도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앞날을 준비하도록 당부하였던 것이다. 최흥종 목사는 1952년 빌링겐 대회(Willingen synod)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보다 20여 년 앞서서 평신도 신학을 부르짖는 선구자였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를 부르짖었다. 교회의 희망을 일신상의 영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절을 팔아버린 거짓 목사보다는 순결한 평신도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오방 최흥종(崔興琮) 목사는 일찍이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유진 벨(배유지) 목사의 사택(광주시 양림동)에서 드린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을 계기로, 배유지 목사가 세운 최초의 호남지역교회인 광주제일교회(광주북문안교회) 초대장로를 역임하였다. 현재 광주의 대표적인 교회인 광주중앙교회(예장합동), 광주서현교회(예장합동), 3개의 광주양림교회(합동,통합,기장)는 모두 광주제일교회에서 분립한 것이어서 현재도 광주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최흥종 목사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개종 초기부터 복음의 영적인 거듭남의 기능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이것을 교회와 교인의 사회적 사명으로 연결시키면서 평생을 살았고, 광주의 전통 있는 교회들은 바로 이런 지도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100년의 호남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배유지 선교사는 1868년 미국 켄터키주에서 출생하여 1895년 4월 4일 한국에 처음 입국하였고, 미국 남 장로교 소속 초대 선교사로 전라도 지역에 파송되어 목포와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하다 1925년 광주에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에 안장되었다. 배유지 선교사의 4대에 걸친 헌신적인 호남선교활동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지금도 유진벨재단을 통해서 북한지원운동을 하고 있다.

최흥종 목사가 3.1만세운동으로 인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광주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에 다시 부임하여 목회에 전념할 때인 1920년 8월 29일에 YMCA 광주지부를 설립하게 되었고, 1924년 최흥종 목사가 제4대 회장을 맡을 때에 비로소 서울 중앙 YMCA 의 인준을 받아 지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21년부터는 광주북문밖교회를 중심으로 광주 최초의 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여성들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 광주 YWCA의 창립을 도왔다. 또한 1921년 최흥종 목사는 일본산 마약을 퇴치하기 위하여 모루히네 방독회를 광주 YMCA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또한 최흥종 목사는 일제강점으로 흩어진 동포들을 보살피기 위한 서시베리아 선교사를 자청했다. 1922년 11월에서 1923년까지 9월까지 봉사하였으며, 1927년 1월에 또다시 서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났다. 그러나 변화된 시베리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감옥에 수감되는 등 4개월 만에 강제로 귀국하기도 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종교탄압 정책에 따라 ‘케·페·우'에 수금되어 40여 일 간 고생하다가 강제 퇴거조치를 당하여 4월 3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또한 최흥종 목사는 광주제중원(광주기독병원 전신)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기 시작한 서서평 선교사(Elizabeth J. Shepping, 1923년부터 초대-10대 조선간호부협회 회장 / 1934년 사망)와 함께 빈민운동도 시작하였다. 광주천 다리 밑과 사직공원 뒤켠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던 걸인들과 빈민들을 위하여 당시 총독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해 1932년에 경양방죽 제방 밑에 움막설치를 허락 받았다. 최흥종 목사 본인도 1935년 3월 〈사망통지서〉를 발송한 이후에는 이들과 함께 잠시 기거하였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들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1909년 광주 봉선동에서 시작한 광주나병원은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1천여 평의 땅에 45인 수용시설로 출발하였으나, 1924년에는 5백6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나중에 여수로 이전하여 지금의 애양원이 되었다. 그는 1932년에 서울 종로 YMCA 중앙회관에 나환자공제회 사무실을 개설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나환자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7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나환자근절협회를 조직하였다. 나환자근절협회 초대회장은 윤치호, 그리고 총무는 최흥종 목사가 맡았다.

이 후에 다시 광주에 내려와 걸인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여, 나환자근절협회 사건으로 대면한 적이 있었던 우가키(宇垣) 총독이 초도순시 차 1932년 광주를 방문였을 때, 최흥종 목사는 전라남도 도청에 있는 총독을 면회하여 경양방죽 제방 밑에 이들을 위한 움막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건축비용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최흥종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노회를 탈퇴한 이후 아예 걸인생활로 나서는 바람에 한국의 디오게네스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 그가 설립한 광주중앙교회 신자들로부터는 추태로 보여지기도 했다. 이 생활에서 그는 한국의 성 프란시스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대부가 되었고, 최목사는 이현필과 부자 간의 의를 맺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4년 5월 20일 지금의 전남대학교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세웠고,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결코 현실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8년 3월에, 최흥종 목사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광주 기독병원의 카딩톤 원장,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과 함께 광주의 결핵퇴치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이현필 선생 휘하의 여자 수도자들에게 고아들을 돌보는 식사 및 살림을 맡아서 헌신하도록 하였다. 이 동광원이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으로 지금도 본선동에 존재하며, 당시 결핵환자를 돌보던 무등원은 지금도 봉선동에서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과 소화수녀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최흥종 목사는 86세로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무등산 움막에 기거하면서 헬라어 원어로 성경을 읽고, 순 한문으로 된 도덕경을 읽으며 10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었다. 최흥종 목사는 이때 아예 유언장을 발송한 이래로 금식을 선포하고 식사를 일체 중지하였다. 이에 최흥종 목사를 따르는 제자들인 광주 YMCA의 이영생·이문환·조아라 장로 등은 지게꾼을 앞세우고 무등산을 올라가 최흥종 목사를 장남 최득은의 안집으로 모셨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금식을 시작한 날로부터 1백일째 되는 1966년 5월 14일 오후 2시 10분에 하늘나라로 가셨으며, 광주시는 모든 학교가 휴교하고, 상가는 철시하였다. 5월 18일 전라남도사회장으로 광주공원에서 10만명이 운집하여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전라남도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사람은 아직까지 최흥종 목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광주시민들은 최흥종 목사를 보내는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모여들었으며, 학생들, 부랑자들, 나환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고, 하관식이 끝난 무등산 무덤에서는 해가 져물어도 도대체 그치지 않는 300여명 나환자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울리었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도 거지와 나환자들로부터 “아부지! 아부지!”라 불리는 나환자, 걸인의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거장이자 지역사회 광주의 아버지로서 무등산에 뼈를 묻고 아직도 광주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빛이다. 이것이 광주가 빛고을이라 불리우게 된 배경이다. 하나님은 오방이라는 큰 영혼을 통하여 호남광주지역의 선교사역을 이루게 하셨다.

한마디로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목자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을 하나로 보고, 이것을 교회를 포함한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천의 방법은 버림과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다섯 가지를 버림으로써 자유함을 누렸으나 이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예속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섯 가지로부터의 자유로움은 그리스도에게 매이기 위한 벗어남이었다. 그에게는 풀고 매는 것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실천한 사랑은 자신과 자기가족을 돌보는데 소홀함으로써 가족들과 제대로 오붓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아픔을 동반했고, 가족들의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같이 한집에서 살아 본 적이 거의 없는 최목사의 자녀들은 거지와 함께 길거리를 지나가는 오방선생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멀리서 “저분이 우리 친아버지라는데...” 하고 눈물지을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이 동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은 참으로 신묘하기도 하다. 최흥종 목사의 친자녀들은 아버지없이 어머니 손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자랐지만, 그들의 자손들 곧 최흥종 목사의 손자손녀들은 현재 모두 평안하게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싶다. 할아버지 음덕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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