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면 최저 생계비도 못받는 목회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국제신학교학장, 본헤럴드모바일대표,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변화산기도원 공동원장 등저서: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등

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2013년 인천노회 목회자 평균 사례비는 130만 4400원이었다고 한다. 54명의 목회자 평균 사례비 100만원 이하인 목회자가 46.3%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그 가운데 절반은 50만원 이하였다. 110~150만원인 목회자는 전체 조사자의 20.4%로 나타났다. 이어 200~300만원인 목회자가 27.8%로 나타났다.

5년 전 통계자료라 자료의 신선도는 떨어지지만, 교회의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점점 고착화되는 상황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제가 속한 성결교단의 경우에도 통계 수치가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지방회(노회)에 속한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더 나아지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를 개척한지 18년째이다. 14년간 자비량 목회를 했다. 자녀양육비는 거의 꿈도 꾸지 못했다. 자녀들은 그 흔한 학원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운영비가 늘 부족하여 메꾸어 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대부분 열악한 지하실부터 개척한 분들의 삶은 비슷하리라 본다.

교회를 위해 드린 물질은 항상 교회와 계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무조건 드렸다. 교회가 ‘나’이고, ‘내’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나는 한 몸이었다. 교회와 나를 명확히 구분해서 교회가 지불할 일, 내가 받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당당하게 요구해 본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아버지가 가정을 위해서 헌신한 것을 따지며 구분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이다. 나와 교회는 한 몸 공동체이기에 요구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비슷한 생각으로 개척교회를 한다. 어쩌면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

교회 cafe 난로

목회자에 대한 예우를 성경에서 근거를 찾는다면 사도바울일 것이다. 목회자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바른가? 그 기준을 성경에서 원리를 찾아보면 좋겠다.

사도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갈5:6)고 권면했다. 가르침을 받는 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한다. 이 표현에는 3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일차적인 의미는 물질을 나누고, 이차적인 것인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셋째는 고난을 함께 나누라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일차적인 의미는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를 책임지라고 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의 생활비를 책임지라고 한다. 바울사도는 선교하면서 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때로는 장막제조업을 하면서 비즈니스선교도 하고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기도 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사도바울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내비친 구절이 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베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1-14).

사도바울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다고" 한다. 바울의 괴로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제정적인 압박감이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선교비를 보냈다. 그것을 내 괴로움에 참여하였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칭찬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4:15,16).

사도바울도 선교 사역하면서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가 두 번 재정의 도움을 주었다. 그 감사편지를 쓴 것이다.

변화산 기도원에서 주서온 토종 밤

사도바울은 목회자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그 기준을 정해주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7-18).

성도는 목회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한다. 당연히 목회자의 재정적인 부분을 채워주어 목회 사역에 근심이 없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신도 장로가 아니라, 초대교회에 직제를 보면 목회자이다. 한국은 초대교회 직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초대교회 장로란 교회의 가장 큰 영적인 어른인 목회자이다. 목회자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인가? 배나 존경하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개중에는 존경받지 못할 목회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 전체를 존경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목회를 위해 생명 걸고 헌신하는 귀한 목회자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또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목회자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성도의 의무이며 기쁨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어릴 적, 춘천에서 떨어진 용화산 바로 밑 산자락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했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우리 가족이 6평정도 되는 작은 흙벽돌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집을 구입해서 장애인 전도사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분은 소아마비에 허리가 굽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여전도사님은 자신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을 섬겨주어야 했다. 그분의 생활비와 겨울이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장작을 만들어 드려야 했다. 생활비라고 할 것도 없다. 최저생계비일 것이다. 겨우 밥만 먹을 정도이다. 빈궁한 농촌에서 한 가정이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초빙해서 예배를 드렸다.  그 씨앗이 자라나서 먼 훗날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다. 성도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귀한 사명이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돌팔매질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향한 거룩한 의무를 버리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누룩이다.

목회자가 사회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과도한 사례비는 문제이지만 목회자가 사례비를 받고 목회를 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교회 여건이 좋아 많은 사례비를 받고 있다면 그 사례비를 주변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공교회 의식이다. 목회자가 먹고사는 기준을 너무 높여, 세상 기준으로 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란 무엇인가? 청교도인들은 절제를 자신을 위해서는 절약하고 아끼며 살고, 이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서는 마음껏 손을 펴고 사는 삶이 절제라고 정의를 내렸다. 과도하게 많은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나누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너무 고급스러운 옷과 음식과 운동과 여행으로 낭비하지 말라.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라. 그러면 신약성경의 전체 주제인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충분히 사례비를 줄 수 없는 작은 교회에서 시무하는 목회자들의 삶은 아주 고달프고 힘들다. 외부로부터 계속적인 부족한 선교비로 충당되면 좋은데, 현실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60%가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가운데 근심 속에 목회를 하고 있다. 그 어려움이 너무 큰 것을 본다. 교회가 연약해서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줄 수 없는 경우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방법은 없다. 이제 목회자도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교회를 운영해야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비즈니스 선교 목회로  접어들었다. 준비 안된 노년처럼, 목회자에게는 준비 안 된 교회 환경앞에 어리둥절 갈피를 못 잡고 서 있다. 막연하게 시간만 지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겠는가? 요행 아닌 요행을 바라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요행은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없는 시간이 지나면 빈궁은 더 깊이 찾아오고, 삶의 질은 더 떨어질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출현으로 인해, 대우받던 민족, 존경받던 민족에서 시기와 질투와 핍박의 대상으로 환경이 바뀌어 노예로 취급받았다. 그와 같은 현실이 목회자들에게 찾아오고 있다.

이제 본헤럴드에서 비즈니스 선교 목회 시대의 문을 열고 있다. 목회자들과 사업가들의 만남을 통해 그 가능성의 길목을 열어가고 있다. 매주 화요일 저녁 6시에 모여 예배로 문을 열고 그 틈새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사명이란 눈에 거슬리는 것을 피하지 않고, 자기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본헤럴드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과정을, 그 사명을 시작했다. 이 시대복음 전도의 방식중에 하나는 비즈니스 미션을 요구한다. 인생은 1막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에 따라 2모작, 3모작, 4모작도 가능한 건강을 물려받았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목회자들이여, 성도들이여. 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잠재적인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다. 나는 오늘도 그 꿈을 꾸며 주님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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