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9-26, 39-42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요한복음 4장의 사건이 있기 전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진술이 요한복음 3장 후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 이 진술을 새겨 놓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27 (세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27-36)

그런데 요한복음 4장으로 건너오면, 1절에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라고 말한 후 3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시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능가하는 유명세가 예수님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26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 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유대 땅을 떠나 갈릴리로 가기로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경계와 적개심이 극도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치 이삭이 그랄 목자들과 우물 때문에 다투게 될 때마다 피한 것처럼 바리새인들과의 다툼을 피하고 갈릴리로 가시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올라가시는데 4절을 보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유대는 남쪽에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있으며, 약 17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건너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직진으로 가는 경우가 되어 빨리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갈릴리로 가곤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9절에 언급된 것처럼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는 것이 일반 관례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단히 혐오했기 때문에 요단 강을 건너 페레아 지방을 거쳐서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합니다. 이는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께서는 사마리아에서 자신이 메시아인 사실을 인정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곳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와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할 때, 주께서는 다른 곳으로 가셔서 주의 그리스도 되심과 왕 되심을 인정 받고자 하실 것입니다. 유대 민족에게는 그 기회가 가장 먼저 주어졌지만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 땅으로 가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주의 메시아 되심과 왕 되심을 인정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의 주 되심은 헬라인으로 상징되는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때는 다름 아닌 주 예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때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구속 이후는 영광을 얻으신 주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모든 열방으로부터 자신이 메시아 되심과 왕 되심을 인정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아무튼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면서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아마 유대 땅 베다니에서 사마리아 수가까지는 약 60킬로미터는 될 테니, 족히 이틀 이상은 쉬지 않고 걸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네 안에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과 또한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먼 길을 오신 예수께서는 수가 성을 지나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샘 곁에 앉으셨는데, 때는 육시, 즉 정오 정도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앉으시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물 샘 곁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한편, 6절에서 말하는 우물은 원어로 (페이게이)인데 샘을 말합니다. 반면에 11절과 12절에서 말하는 우물은 원어로 (후레아르)인데 샘에서 나온 물을 저장해 둔 우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샘과 그 샘에서 나오는 물을 저장한 우물이 함께 있어서, 수가 사람들은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그 우물은 지금도 이스라엘에 현존하고 성지순례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깊이가 30m가 넘는 이 우물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물을 솟아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 우물 위에 야곱의 우물교회가 세워져 있고 교회 지하에 있는 우물에서는 여행객들이 물을 떠서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 우물 곁에 앉아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 11절을 보면, 우물에서 물을 뜨려면 그릇이 필요한데 예수님은 물을 뜰 그릇이 없던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 28절을 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 물을 뜰 그릇도 있고 물동이도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이 말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대화를 마무리 하는 것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대화의 시작은 7절입니다. “물을 좀 달라.” 그리고 대화의 끝은 26절입니다. “내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다.” 

즉, 예수님의 대화는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인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대화를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부탁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화를 위해 부탁하십니다. 물론 예수님도 물을 마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부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가난하고 멸시 받는 사람조차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탁을 들어줄 작은 능력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예수님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 여인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탁 때문에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절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매우 쌀쌀하게 답변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그러나 11절, 15절, 19절을 보면, 그 쌀쌀하던 분위기가 확 바뀌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칭 사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주여”라고 하며 여자가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예수님께 드린 답변은 쌀쌀했습니다. 

그녀는 아마 놀랐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앗시리아 제국은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에 외국인을 거주시켜 혼혈족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마리아는 바사 제국 및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여러 민족과 섞였고, 이에 순수 혈통인 남유다 사람들은 그들을 아예 딴 민족으로 취급하였습니다. 특히 결정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서로 가장 미워하게 된 계기는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연히 함께 스룹바벨 성전을 지을 생각을 했지만 유대인들이 끼워주질 않았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400년경에 자기 땅에 있는 그림심 산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하자, 결국 서로를 심하게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라고 말하였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놀라운 답변을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즉, 내가 이 우물에서 나는 물 말고 다른 생수를 직접 주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실 물에 대한 대화에서 영적인 음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영적인 생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물론 야곱의 그 우물은 생수가 흘러나와 물을 저장한 우물이기에 예수님과 그 여인이 생수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주여”라고 호칭하며 정중하게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은데 (이 우물 말고)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이까?”(요 4:11). (생수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어디서 그 생수를 가져오시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이 우물 말고 다른 생수를 주신다고 하시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신기함을 갖게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풍기시는 위엄과 거룩한 분위기 속에서 주께서 말씀하신 생수가 목마를 때 마시는 생수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뭔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수’라는 단어가 이 여인과 예수님의 공통 관심사입니다. 따라서 대화가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곳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주님은 그 여인의 육체에 필요한 물이 아니라 그 여인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생수를 줄 수 있다고 답변하십니다. 이때 표현이 매우 정확합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원어로는 (게네세타이 엔 아우토 페이게이 후다토스 할로메누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주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받은 사람은 “그 물이 그 사람 안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페이게이), 즉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성령을 말씀하실 때 변함없이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로 비유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묘사한 두 번째 내용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었습니다. 바로 이 내용이 정확하게 생수를 차고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7장에서 우리 주님은 더욱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때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보혈을 흘리시고, 그 후 부활 승천하여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때부터 만유의 주와 만왕의 왕으로서 성령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처럼 죄악된 삶으로 인하여 그 영혼이 갈급한 자들마다 그리스도 예수께 나아오면, 주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기에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아가 생수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죄 사함에 대한 확증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서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되고, 또한 성령으로 부음 받음으로 그 영혼이 생수의 단 비를 흡족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어디서 옵니까? 하늘에서 옵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오십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시며, 그 후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의 영으로부터 풍성한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무한한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써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주의 백성에게 풍성하게 부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이에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이 여자는 예수께서 주시려는 그 물이 신기한 물인 것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아직 몸으로 마시는 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그 여인은 주께서 주시는 생수가 몸을 위한 물이긴 한데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그런 신비한 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인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상태에서 그 여자의 영적인 문제로 곧바로 들어갑니다. 그녀의 깊은 갈증은 몸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으로부터 나오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5). 

그 여인은 주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할 어떤 신비한 물을 줄 것인데, 그 물을 주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답변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녀의 죄 문제를 다루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영적인 갈증은 죄로 인해 파생되고 또한 부패한 인간은 그 갈증을 죄악 된 방법으로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사실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맞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참조, 요 4:17-18). 

예수님은 그 여인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이는 올바른 진단이 되어야만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죄로 인해 빚어진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고자 또 다른 다섯 남자를 겪어 보았고, 지금도 불법적인 남편과 육체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죄의 상태에 있었습니. 그런데 그 사실을 예수께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게 됩니다.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9-20). 

이 여인은 모든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죄와 및 영적인 갈급함과 관련해서 예배를 말합니다. 이때 그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의 예배가 옳은 것인지 아니면 유대 사람의 예배가 옳은지를 묻습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는 이 여인은 일단 장소만 언급합니다. 즉,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배가 가장 중요한데 어떤 예배가 옳은 것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은 가장 근본적이고 귀한 내용을 담으십니다. 즉, 예배에 대한 그 여인의 관심과 그녀의 영적인 갈급함은 서로 연관성이 너무나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영적인 갈급함에 대한 답변에 놀랍게도 예배와 관련한 답변이 나오는 것이요, 그리고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반드시 메시아가 있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예수님은 참 예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참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들만이 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하신 아들이신 예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양자의 영이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자들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그런데 양자의 영을 받으려면 우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메시아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4-7)

하나님의 그 아들이신 예수께서 언제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십니까?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 근거는 속량이며, 아들의 명분을 주신 것은 부활 이후 영광을 얻으신 후 성령을 보내신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는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가 맺어진 자들만이 드릴 수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니, 거듭난 주의 자녀들이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한 주께서 보내신 성령 안에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비결은 참 예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된 예배는 어떤 장소나 형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해 온 그 메시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자녀 된 신분이 된 주의 자녀들이 성령 안에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이러한 참된 예배를 통해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은혜와 생명과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수의 강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및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마침내 이 여인은 모든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임합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가장 위대한 진리, 성경 전체가 말하는 가장 소중한 진리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그라”(요 4:26). 즉, “나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 
즉, 그리스도를 통해 너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가 될 수 있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이며, 그 성령 안에서 거듭난 자들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이런 참 예배가 그 여인의 죄로 말미암는 끝없는 갈증과 영적인 목마름을 영원히 해소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 여인은 참 예배 가운데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넘치는 생수의 강을 마시며 항상 그녀의 죄 문제와 영적인 갈급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이 여인은 그 영혼이 순식간에 만족되면서 기쁨과 감사 가운데 힘차게 예수님을 증거한 사실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39-42)

그리고 수가 성에 살던 수 많은 사마리아인들 역시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많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백은 자신들이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고려하게 되면서 더 깊은 단계의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이) 그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과 함께 제자들을 다시 만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죄로 인해 영혼이 갈급한 자들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알고 믿게 함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며 그것을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사마리아 여인 하나를 구원하고 또한 그 여인으로 말미암아 또한 여러 사마리아인들 및 다른 사람들을 계속 구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들르신 것은 대단히 의도된 사건으로써 아버지의 뜻 가운데 죄 많은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고 또한 그 여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오늘 사건을 통해 “참으로 세상의 구주”로 인정 받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온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역할이며, 그 역할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주의 자녀로서 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로 인하여 인간의 영혼은 무한한 용서와 은혜와 사랑과 감사와 만족과 영광을 맛보며 그 영혼의 모든 갈등과 죄책과 가난함이 해소되어 하나님의 평강과 풍성함과 만족을 넘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는 성령으로 그 갈급한 영혼을 한없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생수로서 그 물은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으로 교회가 나아갈 길은 참된 예배의 회복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예배가 살아날 때 그 교회로부터 온 세상을 향해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러한 참 예배가 회복되는 날을 바라보며 예언하였습니다.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1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경계선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몫이니라](겔 47:8-13)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혈로 인한 성령의 역사가 완전하게 성취되는 영원하고 궁극적인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는 온 세상을 생수의 강으로 채우는데 가장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자녀들이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예배자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거룩한 산 제물의 예배로 승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께서 우리를 죄와 영적 기갈로부터 자유 하게 하시고 무한한 생수의 강, 곧 성령을 부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사실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 직전에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5-48)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고 모신 가운데 주의 자녀들이 되어 언제나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림으로 하늘의 생수로 만족과 감사와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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