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공동체는 정글 법칙이 난무하고 있다. 생존은 개인의 문제이다. 천국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약하다. 공교회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도 빈약하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 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저서: 주기도문연구,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충성된 일꾼되어가기 등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포도원 품꾼들(마20:1~16)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포도원 주인이 노동 시장에 가서 일당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데려온다.

(2)주인은 하루에 다섯(오전 6시, 9시, 12시, 3시, 5시) 차례 노동 시장에 가서 동일한 임금을 약속하고 일꾼을 데려 왔다. 히브리인들의 시간 개념을 보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를 하루로 정했다.

(3)일당을 지급할 때 ‘나중 온’자들부터 지급했다.

(4)먼저 온 일꾼들이 불평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똑같이 받은 것에 대해 불평했다.

(5)주인의 반응을 보면, 나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 나는 약속을 어긴 것이 없다. 똑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라고 했다.

낡은 건물과 마당에 있는 나무가 조화롭다.. 주님의 마음만 있다면 교회 공동체는 품격이 살아날것이다.

나는 비즈니스 선교의 개념을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그 근원을 찾고 싶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큰 배에 갇혀 있는 분들은 흔들림의 강도를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위기속에 있는 작은 배들은 그 흔들림이 너무 심해 불안과 염려로 심각한 고민중에 있는 분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자비량으로 평생 목회하던 목사님이 월세가 밀려 임대보증금까지 월세로 다 사라지고, 교회의 방향을 잃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 단지 돈 때문이다. 그것도 큰돈도 아니다. 교회 임대료와 가정 살림이 목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분의 탄식 소리는, 파산의 경계선에 있는 분들에게는 서로 공감할 수 있지만 배부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한다. 어떤 목사는 한 수 훈계를 한다. 목회란 다 그런 것이야. 그것을 믿음으로 뚫고 나가야 진정한 목사가 되는 것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파산의 경계선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수많은 시간을 외칠 것이다. 하나님 왜 나의 어려운 상황을 돌보지 않습니까? 오직 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나의 청춘을 드렸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의 결과가 왜 이렇게 칙칙하게 무너져야 합니까? 단지 돈 때문에...이것이 한국교회의 모판인 작은 교회의 민낯이다.

모판에서 모가 건강하게 자라지 않고서는 논에 이식할 벼가 없는 것이다. 모판이 점점 황폐해져가고 있다. 산업화로 인해서 농어촌이나 지방에서 신앙생활하던 분들이 대거 도시로 진입하면서 도시 교회는 특수를 누렸다. 빨대만 잘 꼿으면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아 옛날이여이다. 왜, 그럴까? 그 특수도 이제는 끝나가고 있다. 좋은 날은 다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그 특수의 마지막 자락에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산업화로 도시 교회가 무임승차 했는데, 지금은 도시에 있는 작은 교회들인 모판이 황폐화 되어 이식할 모들이 점점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금 지나만 공동화 현상이 일어날 수 도 있다. 이런 공동화 현상을 막을 길은 건강한 작은 교회를 세우는 길 밖에 없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200.300만원 정도만 있어도 교회 월세를 내고 자비량 목회를 평생 한다. 최저 수준의 자비량 목회가 가능하면 어떤 목사도 교회 문을 닫지 않는다. 성도 한 명만 있어도 교회 문을 닫지 않는다.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이다.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다. 파산의 경계선에 있는 교회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기도하며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교인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지랍이 넓어 편한 길로 가지 않고 항상 비포장도로만 찾아다닌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다. 하나님이 목회라는 숭고한 길을 걸어가면서, 왜 또 다른 사명을 주셨을까? 왜 나에게 언론을 하게 했는가? 언론의 사명은 정론보도이다. 단지 이 시대의 문제를 까발려 속시원하게 전달하라고 언론의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성격상 비판을 위한 비판에는 관심이 없다.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데는 기질적으로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 나에게 주신 언론인의 사명은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의 강점을 살려내라는 사명일 것이다. 또한 무너져가는 작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살릴 대안을 만들어내기를 원하실 것이다. 이것을 위해 본헤럴드가 허브로 사용하기를 원하실것이라 보고 있다.

때가 되면 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이 삶이다. 이 가을에 주변을 돌아보면 좋을 듯 싶다.

예수님의 이야기 중에 포도원 품꾼들 비유에서 몇 가지 비즈니스 미션의 가치를 찾아보고 싶다.

(1)포도원 주인이 왜 다섯 번 노동 시장에 나갔을까? 이치에는 맞지 않지만 나는 사회적 계층으로 구분해보았고, 또한 교회 규모로 대입해보았다. 오전 6시는 상류층, 교회는 대형교회. 오전 9시는 중산층. 중대형교회, 정오(12시)는 중산층과 서민층 중간지대. 교회는 중형교회(100~300명 이하), 오후3시 서민층, 100명 이하 교회, 오후5시 최상위계층. 교회는 50명 이하 작은 교회로 구분해보았다.

포도원 주인은 하루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후 5시에 노동시장에 나가서 일꾼을 불러 일을 시켰다. 오후 3시, 5시까지 노동 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의 특징은 대개 능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힘 있고, 기술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아침 일찍 노동시장에서 팔려나갔고, 오후 시간까지 있는 분들은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분들이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이런 분들을 불러들였다.

일을 위해 부른 것이 아니다. 약한자에 대한 배려이다. 돌보기 위해서 부른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사랑이며 긍휼이다. 이것이 공동체 정신이며, 천국의 가치이다.

또한 일꾼들은 오후 5시까지 노동 시장을 떠나지 않았다. 목회자들은 아무리 삶이 빈궁하더라도 사명의 장에서 떠나면 안된다. 자비량 목회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 머뭇머뭇 거리다가 시간을 놓치면 진짜 파산한다. 비즈니스 선교의 시대이다.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있다. 오후 5시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다. 끝까지 사명의 장에서 버텨야 한다.

(2)주인은 임금을 줄 때 왜 늦게 온 자들부터 주었을까?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온 건강한 사람은 이미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은 점심을 못 먹었다. 주인의 긍휼한 마음과 배려가 돗보인다. 이것이 천국이다.

본헤럴드가 추구하는 비즈니스 미션은 오후 3시에 있는 교회들에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스스로 고기잡는 그물을 제공하고, 오후 5시 파산의 경계선에 있는 분들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동체를 세우려고 한다.

(3)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고, 한 시간 일한 사람도 동일한 임금을 받았다. 이 말씀에서 주인의 의도를 우리는 파악해야 한다. 많이 일한 사람들은 쓰임받은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한 시간 일하고 동일한 임금을 받은 사람은 주인의 은혜를 감사로 받으면 된다. 이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다.

(4)모든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동일한 임금을 준 것은 주인의 뜻이며 마음이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항의를 했다. 왜 한 시간 일한 사람들과 동일한 임금을 줍니까? 불평을 했다. 주인은 말한다.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마20:14)이니라. 주인의 대답속에 우리의 미래를 풀어갈 공동체의 핵심 가치가 있다.

우리 사회는 계층간, 직업간, 지역간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란 구체적인 대안이 정치권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목회자 세계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너무 크게 존재한다. 정글이 법칙이 난무하고 있다. 생존은 개인의 문제이다. 천국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약하다. 공교회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도 빈약하다.

천국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일까? 늘 고민한다. 상류층과 중산층에서 목회를 하다가 은퇴후에도 중산층 삶을 누리며 살고, 서민층과 취약계층의 수준에서 힘들게 목회를 하다가 은퇴후에도 동일한 삶의 연속이라면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의 모습일까?라는 의문이 늘 들었다. 이것은 내려놓음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산물이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주님이 생각하는 천국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최소한 은퇴후에는 먹고 자는 것만큼은 어느 정도 공평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천국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다양한 삶의 마을 공동체가 해답일 것이다. 이 꿈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는 백세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 사회의 숙제이며 함께 풀어가야 될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인 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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