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103) - 욥기(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부회장 KC대 전 총장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욥기38:4,36,41).

 

욥의 고통이 나의 고통일까? 욥이 당하는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처절하게 느껴지는가? 나의 고난은 의로운 자의 고난일 수 있을까? 욥이 겪는 고통은 내가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기에 그저 남의 고통으로 보여 진다. 다만 우리가 고통 중에 있는 경우라면 조금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겪게 되면 나의 고통도 이럴 수 있을까 하고, 또 “이러한 고통이 나의 고통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정화(카타르시스)를 하게 된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갖는 인간의 감정은 연민의 정이라 한다. 타인의 고통으로 대하지만 쉽게 그 고통에 대하여 잊어버리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종교적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유가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관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헌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은 뭔가 잘못된 것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관점이다.”(수전 손택)

욥의 고난은 단지 그가 지은 죄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 이니라”(욥23:2).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잇몸)뿐이로구나”(욥19:20).

우리는 욥의 고통을 보고 있으면서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가? 그저 욥의 고통, 타인의 고통이라고 보며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말한다. 수전 손택은 전쟁 비극 사진을 찍으며 인간의 고통, 전쟁의 참화, 비극적 사실을 전한다. 그녀는 인간의 인권을 주장하는 참전 여류작가이다. 그녀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비극적인 사진)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어떻게 보면 욥의 고통도 이러한 비극적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볼 때 느끼는 것이 최초의 자극만 줄 뿐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그저 욥의 고통, 타인의 고통일 뿐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 난민의 비극은 그들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뉴스일 뿐이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빌닷)”(욥18:3-4).

욥기 28장은 지혜의 찬양시로 본래 독립적으로 있었다. 욥기 28장은 지혜를 인격(잠8장)으로서 아니라 사물화된 실체로서 노래한다. 인간은 숨겨진 보배를 찾지만 인간이 도달하기에는 지혜는 그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13).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21).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12).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곳은 어디인고”(20). 이처럼 후렴구처럼 나온다. “지혜는 어디서 찾아 질 것인가?” 오직 하나님만이 지혜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 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28:23-28).

이 욥의 연설로서 지혜 찬양시를 도입하는 목적은 분명히 비평적이다. 즉 욥기의 마지막 분석으로 지혜는 욥과 친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편집에 있어서 보다 후기에 부가된 것(28절)으로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잠1:7)과 일치하여 이러한 통찰력을 제한한다.

욥기 본문의 변경된 구절들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이다. 연설의 첫 두 군은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돌아가면서 말하는 것이지만 세 번째 이야기 군(욥22-27장)은 불 완성작으로서 빌닷(엘리바스)이 유일하게 간략히(6절) 말하고 소발은 전혀 말하지 않는다. 친구는 이 사람(불행)의 불행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 않은데 있다고 말한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엘리바스)”(욥22:5-7).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빌닷)”(욥25:4-6).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불행의 원인과 씨앗을 보는 지혜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된다.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 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욥31:5,7). 욥기는 오늘도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서 나의 고통을 보며 그들의 고통으로 들어가 같이 체휼하며 복음을 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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