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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전제에서 이성의 활동은 장려되어야』

중세 신학자요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이성적 논리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모놀로기온』(Monologion)은 신플라톤주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나는 믿기 위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기 위하여 믿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알 수도 없다.”라고 한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이성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하나님 존재 증명을 위한 “본체론”(ontology)은“하나님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분이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로 제한 받지 않는다. 이러한 위대한 존재가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논리를 존재론적 증명 혹은 설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오로지 선험적인 직관과 이성을 통해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이후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앨빈 플랜팅가 등 많은 철학자들도 그러한 이론의 변형된 형태의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 이마누엘 칸트 등 여러 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본체론적 설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존재론적 논증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로, 선험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주장은 “나는 결혼한 총각이다.”처럼 정의상 모순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더글라스 개스킹은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방법을 비꼬아 같은 논법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면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하나님이라면, 존재하면서 천지를 창조하는 하나님보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천지를 창조하는 하나님이 더 위대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셀무스의 하나님 존재 증명에서 “더 이상 대상화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기초”를 “가장 큰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앎을 개념화 하려고 시도하다가 논증될 수 없는 것을 논증하려는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논증의 대상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선언하지만 논증하지는 않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을 논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위하여 요한의 증거가 필요하지만 주님에게는 인간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하나님 편을 드는 태도나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변신론”을 통해 하나님을 변호하였지만 그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기보다 결국 인간 이성의 권위를 강조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 이성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하나님 형상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 자체가 하나님과 대척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 이성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여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셀무스의 본체론이나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나 그 동기는 모두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높이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은 인간의 편듦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되거나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전제에서 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마치 기하학의 공리와 같아서 받아들이는 것이지 거기에 일체의 이성적 사유를 첨가하거나 합리적 추리를 통해 어떤 부분을 바꾸거나 제거하면 안 됩니다. 교리를 세우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러한 신앙의 전제에서 가능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2세기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믿으면 안다.”고 하였고,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 믿는다.”고하였는데, 이는 믿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신앙을 공리와 같이 전제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이성적인 작업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겸손입니다. 이성적 신학함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이는 전제에서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아무리 합리적인 의견이라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거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잘 지적하였습니다. 부버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이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주장이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지만 부버는 어떤 사람의 의견이 비 복음적이거나 틀렸을 때만 이단이 아니라 그 주장이 합리적이고 사실이라도 집요하게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태도가 아니고 자신의 이성을 믿는 때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인간 이성의 활동 영역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영역에 한정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전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통하여 이해하고 납득하고 동의하는 부분을 주장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심지어 이성적 판단을 통하여 하나님께 항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통보를 받고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합리적인 호소에 합리를 넘어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섯 번에 걸친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의견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지만 이성적 판단을 통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호소하는 이들의 태도를 물리치시거나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용납하십니다. 

인간의 이성적 의견이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브라함처럼 어느 순간에 자신의 의견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과 대조되는 인물이 요나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려는 뜻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끝까지 자기 의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도 자기 의견을 포기하지 않고 끝가지 하나님께 대항하였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끝까지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요나의 그런 불신앙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 사람들을 구원하셨지만, 요나가 결과론적으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기여했다고 하여 그의 불신앙 자체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악한 날에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견을 낼 가능성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불완전성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어느 순간까지만 의견을 주장하되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를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을 확대 적용하면 이성은 이성의 영역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고 그러한 이성의 합리적 활동은 장려되어야 합니다. 

이성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예수님에게서 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누가복음 22:42절에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께 요청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옳고 정당하다고 하여 끝까지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고 정당하다고 해도 “나는 여기까지만”이라고 판단하고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성이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이성을 하나님 앞에 무릎 꿇리는 결단의 자세가 곧 신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사상과 철학은 인간 자신을 모든 탐구와 표현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중세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종교적 본성과 인간이 창조주와 맺은 관계를 강조하였지만 르네상스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자연 즉 물질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관심의 근저에는 하나님과 초월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존재하는 것은 물질 뿐이라는, 기독교 신앙과는 반대되는 소위 자연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이 보여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지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게 됩니다. 토마스 홉스의 인간에 대한 왜곡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서 물질로 된 존재일 따름이라고 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은 소위 이신론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은 하되 창주 후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 시계공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계의 자연 질서에 인격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는 방관자로 왜곡한 것입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길을 열고 홉스와 데카르트 등이 진작시킨 이 철학은 급기야 남부 유럽의 모든 문화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인데, 이 다윗은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 아니라 인간은 위대하다는 이상을 표현한 인본주의의 표상입니다. 1471년 플리지아노의 오르페오는 중세가 시작된 이래 가장 철저한 세속 연극이었고 이 때 공공 페스티발과 연극이 교회와 유대를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하나님과 초월적인 기독교의 가치를 거부하였고 뒤 이어 등장하는 계몽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더욱 강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것을 무시하였습니다. 인간 이성에 무한한 권한을 부여한 계몽주의는 진리란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또한 자연 질서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에 충격을 준 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1756년 리스본 대지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 혁명(1789-96)입니다. 리스본 지진은 리스본과 포르투칼 대부분을 파괴시켰고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지진은 자연 질서에 대한 의심을, 프랑스 혁명은 합리주의의 구조와 질서에 대한 의심을 사람들로 하여금 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우주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그 대안으로 신비와 상상과 느낌을 진리의 기초로 보는 낭만주의로 진행하게 됩니다.

괴테, 쉴러, 레싱 등이 다 계몽주의의 합리주의 사상에 반대하여 감정을 강조한 이들입니다. 독일에서 시작된 낭만주의는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의 워즈워드, 콜리지, 바이런, 키츠, 셀리 등은 낭만주의 사상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음악이 등장합니다. 합리주의는 지성을 강조하였고 낭만주의는 진리를 발견하는 기초로서 감정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모든 합리주의와 낭만주의가 하나님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였고 또는 왜곡하기도 하였습니다. 기하학에서 공리는 수시로 바꿔질 수도 없고 바꿔서도 안 되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전제는 합리적 필요에 따라 바꿔질 수도 없고 바꾸어도 안 됩니다. 그리고 신앙을 전제하였다고 하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주의, 르네상스, 계몽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하나님과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오만이 문제이고, 하나님과 신앙을 전제하는 교회는 이성과 합리를 공부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무지와 태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신앙의 전제에서 인간 이성의 합리적 활동에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상하 목사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0,11)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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