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의 분위기는 살기가 등등합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 때문에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이 대단히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보다 더 인기를 끄는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하자 그들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이에)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1, 3-4). 

그 후 예수께서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근처 베데스다 연못을 지나시다 거기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 5:16). 

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요 7:1). 

그 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한 마음이 되어 그를 체포하라고 군병들을 풀어 놓습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라”(요 7:31-32).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를 알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9-40). 

또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출교시켰습니다. 이는 유대 사회 속에서 아무런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였음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시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더욱 발광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시력을 찾은 그 맹인의 부모를 데려다가 심문합니다. 이 때 그 부모가 그 당시 상황을 잘 알기에 직접 그 아들에게 물으라고 지혜롭게 답변합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 9:22). 

심지어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마저 출교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2-43). 

사실 유대 지도자들은 여러 차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계속 놓쳤습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요 10:39). 

나사로가 병들어 죽음으로 예수께서 그 가족을 만나러 베다니로 가시려고 하자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제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나사로를 살린 후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모의함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을 피하여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요 11:53-54). 

그리고 이 즈음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요 11:57)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이제 예수께서 그분의 공생애 사역 중에 마지막 사명인 십자가를 지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유월절 명절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그 배경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지난 3년 반 동안 날마다 함께 하던 제자들을 이 땅에 두고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 하늘로 돌아가실 때가 다 된 줄 아시고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께서는 그들 역시 어둠에 속한 이 세상에서 많은 미움과 배척, 그리고 환난과 고난을 당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크게 위로하며 격려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들은 영원토록 주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니 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실 것입니다.  

1절에서 ‘끝까지’는 원어로 (에이스 텔로스)입니다. 이는 시간 개념으로는 영원한 것을 말하고 질적인 개념으로는 완전하다는 개념입니다. 또한 사랑하다는 원어는 (아가파오)입니다. 따라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뜻은 완전한 사랑으로 영원토록 변함없이 완전하게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손 안에 모든 권세가 쥐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완전한 권능과 능력으로 끝까지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주의 사랑이 주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와 죄악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나 반드시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한편,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어 (테크니아)는 아버지가 갓난 자녀를 향해 갖는 가장 큰 보호 본능과 애착과 사랑 가운데 자녀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죄 사함을 받아 구원 받는 자를 향해 단수로 (테크논), 번역하면 ‘소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기까지 자기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하는 대상들이니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하게 컸겠습니까? 따라서 제자들을 (테크니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예수께 주신 바 된 자들이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들에 대한 우리 주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6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6, 8-11)

하지만 그 “작은 자들”에 속하지 않는 가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였습니다. 사실 그는 마귀에게 철저하게 종노릇하는 마귀 같은 자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조금이라도 가룟 유다를 미화하는데 동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그는 인류 역사 가운데 메시아를 돈 받고 팔아먹은 가장 사악하고 위선적인 마귀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요 6:70-71). 

또한 본문의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고 기록되어 있고, 12장 4절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지극히 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자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며 호통치는 가룟 유다를 볼 수 있는데, 사도 요한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유월절 양이 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유월절 저녁을 먹는 중에 갑자기 신기한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신 것입니다.  
 
원래 유월절 예식에는 발을 씻겨주는 절차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볼 때 이 사건은 매우 급작스럽고 당황스런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중동 지방에서 식사 시간에 남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으로 닦아주는 행위는 오직 노예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이 행위는 “내가 너희의 노예가 되어 너희를 섬기노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알고 있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위를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 13:8).
이는 “나의 선생이며 주이신 예수님께서 제 발을 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답변이 엄중합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 
즉, 예수께서는 그들의 발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실 것인데, 이러한 주의 희생과 섬김을 거부하면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이 말은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이때 주께서 베드로의 이러한 진심을 접할 때 얼마나 귀하고 대견스러웠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또한 거룩한 생명을 얻어 깨끗하여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이러한 주의 은혜에 동참하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요 13:11). 

사랑하는 여러분!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에 들어 있었지만, 가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실 구세주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거룩한 공동체의 지체가 아니었습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 13: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와 선생이셨습니다. 그런데 노예처럼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절정은 십자가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와 선생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를 한 것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이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시기 위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5) “이를 행하라.”
고 하셨고, 심지어 이러한 행위를 알고 행하는 제자들의 경우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 13:20).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께 속한 우리는 예수님의 종의 자세, 희생의 자세, 섬김의 자세를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훗날 베드로는 주님의 이 교훈을 기억하며 서신을 씁니다. 
[1 나는 …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1-5)

거듭난 우리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섬기면서 양 무리의 본이 될 때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들은 말할 것 없고, 교회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모든 성도들은 온 세상 사람들 앞에서 희생과 섬김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본이 되려면 세상의 외모로 불리는 학벌, 재력, 생김새, 인기, 재능 등을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 것 있으면 그것들로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며 닦아주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이 될 것이고, 그것이 복음을 행하며 누리는 참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과 겸손을 행함이 바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가장 강력한 비결이고, 또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공동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며 든든하게 서가는 비결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가짜 제자로 인해 그 심령이 괴로움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가짜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을 아심에도 주의 자비와 긍휼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제시하십니다. 즉, 가룟 유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강권적으로 처리하지 않으시고 계속 유다에게 자비와 긍휼의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장 그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자비와 긍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분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원수를 대할 때 우리는 끝까지 긍휼과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고 나를 이용하여 자기 실속을 챙기려는 사람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보다 힘 센 사람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 있을 경우, 일반 사람들은 자기 힘을 사용하여 내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신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여 주께 배운 제자들이라면 그가 스스로 떠날 때까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계속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떡 한 조각을 주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손을 내미신 것을 뜻합니다. 즉, “나를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하자꾸나.”라고 마지막 제안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즉 주의 가장 큰 긍휼이 나타나는 그 순간, 가룟 유다는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고 주를 떠났습니다.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대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 13:26, 27).

최고의 긍휼이 나타나는 그 순간, 그것을 발로 차고 멋지게 어둠으로 들어가는 가룟 유다! 그리고 최종적인 그의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 곧바로 사탄이 그의 속에 들어갑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천국에서 제외 시키시는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끊임 없는 자비를 거절함으로 스스로 천국에서 떨어져나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께 속한 거룩한 교회 공동체 역시 결코 사람들을 내쫓지 않습니다. 단지 어둠에 속한 자들이 거룩한 공동체의 빛을 보고 그 빛이 부담되고 싫어서 스스로 떠날 뿐입니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의 거룩한 교회로부터 출교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가룟 유다는 거룩한 주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주의 공동체는 알곡들만 남은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룟 유다) 그가 (공동체에서)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2).

그리고 곧바로 예수님께서는 순결한 교회 공동체를 향해 가장 뚜렷하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3, 34-35).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예수께서 친히 교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순간입니다. 그 공동체에는 가룟 유다가 제외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예수 공동체는 이미 바리새인들의 공동체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배척과 미움과 핍박을 받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사랑과 긍휼과 거룩함의 공동체는 이런 어둠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의 모든 죄가 사하여질 것이며 나아가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생명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심령이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마음으로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새로운 복음의 공동체에게 주신 예수님의 계명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새 계명입니다. 그 계명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처럼,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적인 새 계명이었습니다. 

그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는 계명이었습니다. 얼마큼 사랑해야 합니까? 십자가에서 서로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섬기고 사랑하라는 명령이 새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새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 종이 되어 섬겨야 하기에 그들의 주와 선생이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에 주의 자녀들에게 동일한 새 계명을 당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계명은 구약 율법에도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께서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했을까요? 분명히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계명을 구약의 계명과 구별하며 강조하십니다. 왜 새 계명입니까?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의 이 새 계명을 다른 곳에서는 “그의 계명”이라고 하여 뚜렷하게 구약의 사랑 계명과 구분하며 특징을 짓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을 보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고 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 또는 "그의 계명"일까요? 오늘 본문, 34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가 주님의 계명을 다른 계명과 구분하고 있는 것이요 "새 계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17절은 새 계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2-14)

여기서 우리는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 때문인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의미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기 바랍니다. 또한 십자가의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과실을 맺게 하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받게 하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2절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다른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려는 자들에게 특별한 기도응답이 약속되어 있고,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주 예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라 하시며,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신 것이 새 계명입니다.

네, 맞습니다. 이 새 계명은 복음의 시대에 있어서 유일한 계명이요 주님과의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진 유일한 계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과 구분시키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주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수 없는 계명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해야만 주의 제자들이 세상과 구분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새계명을 우리가 행하면 우리를 통해 생명이 흐르고 사랑이 흐르고 빛이 흐르고 평강이 흐르고 감사가 흐르고 기쁨이 흐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임에도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 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 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새 계명으로 주어진 십자가의 사랑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은 끊임없이 기도를 통하여 자아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이 주의 새 계명인 아가페 사랑을 순종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 계명을 지키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에만 이 사랑의 새 계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의 사랑은 로마서 5장 6-8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단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괴수 같은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이웃이 험악하고 나를 조롱하고 대적하고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사랑으로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새 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은 내 자신의 자존심과 교만과 육신의 세력을 죽이기 위한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성령의 살아 있는 역사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에 실천되는 사랑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평생 이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와 거룩한 교제 가운데 신앙의 연단과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유일한 새 계명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특이한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가페 사랑을 행하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미소가 환하게 비췰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십자가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죄 많고 교만한 나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내 대신 감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인데 우리를 위해 가장 무서운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가페의 사랑의 증거로서 보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분을 믿으며 서로 사랑하기 바랍니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새생명으로 충만해지기 바랍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그리고 주님의 생명이신 새생명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주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넉넉히 지키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새 계명을 우리 거듭난 신자들이 지키려면 무엇보다 반드시 겸손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노예의 자세로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예수님처럼 그들의 노예 된 마음을 가지고 섬겨야만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는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세상으로부터 많은 배척과 핍박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 내부에도 가룟 유다처럼 마귀의 종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우리의 주요 구세주요 선생이요 왕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부에 들어온 가짜 및 원수들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른 참된 지체들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이를 삶 속에서 행하기 위해서는 오직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는 종의 마음을 가지고 늘 그리스도의 사랑에 젖어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젖어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고 믿고 주를 의지하면서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생각하고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 생명을 얻고 새 계명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 반드시 많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맺혀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받아 주의 새 계명을 몸소 삶으로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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