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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거룩'과 '추함'의 경계선...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변화산기도원 마당,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품격이 그립다. 세상적인 '것'으로 포장되지 않아도 숭고한 '그' 모습이 그리운 시대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아름다운 칭호와 품격을 현격하게 떨어뜨리는 요인들이 점점 많이 드러나고 있다. 주님나라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기적으로 채워가는 '못된' 욕심으로 물들어간다면 이 땅은 점점 추함이 세상을 덮을 것이다. '거룩함'과 '추함'의 경계선은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가? 아니면 말씀대로 살지 않는가? 이것이 기준점이 된다. 우리가 믿는 경전인 성경 말씀대로 살 아 갈려고 몸부림칠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다.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최고의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이다. 아주 적극적인 황금율이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라는 적극적 주문이다.  우리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존중 받을려면 세상 사람들 정도의 윤리의식과 섬김으로는 부족하다. 그들보다 더 높은 가치의 거룩성과 섬김이 필요하다. 다른말로하면 말씀을 살아내야 한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함부로 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엄청난 브랜드가 형편없이 추락한다. 21세기는 브랜드 시대이다. 브랜드의 가치가 추락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떠난다. 이 말은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브랜드가 없는 교회는 미래가없다. 눈에 확연히 보이지 않지만 미세한 차이로 계속 추락한다. 어느날 보면 절망의 끝자락에서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의 심연에 허덕거리게 된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담임,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등. 저서: 주기도문 연구 등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비극을 지적했다.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다. 이런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냐고 묻고 있다. 이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이런 믿음은 자신도 구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을 상실한 믿음의 결말이다.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기독교의 첫 관문인 구원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들여다 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고, 바울사도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관점인것 같은데 두 관점은 동전의 앞뒤처럼 함께 간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다.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대신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양심이다. 양심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단지 양심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 이것이 양심의 한계이다.

율법이외에 하나님께서 주신 한 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차별이 없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워진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사도행전에 나온 앉은뱅이를 보라. 앉은 뱅이의 관심사는 오직 빵이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준 것은 빵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었다. 그 결과 앉은뱅이는 일어났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외의 또 다른 믿음의 법은 차별도 없다.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꽁짜로 주신 것이다.

이 꽁차로 주신 구원의 선물은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간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준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던진 사건이다. 오직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 자기를 버린 사건이다. 주님의 사랑의 은혜를 체험한 모든 사람들은 오직 십자가 십자가의 그 거룩한 희생의 섬김을 기억할때마다 울며 울며 주님앞에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오직 섬김의 삶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구원의 선물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이다.

그러면 의인이 된 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방향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 더욱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들은 율법을 더욱 견고하게 지켜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유익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의 비극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믿음은 행함으로 구원이 완성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배고픈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따스한 말이 아니다. 배려깊은 말이 아니다. 우아한 말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야고보 사도는 극단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라고 말했다.

요한 사도도 사랑은 행함으로 완성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4,18).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사랑은 동사이다. 동사는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한다. 자신의 생명을 죄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인 것이다. 사랑은 미사여구가 아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우리의 인생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도 사랑하지 아니하면 여전히 그는 죽음의 골짜기에 갇혀 살아가는 분들이다. 그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력도 향기도 기쁨도 감사도 은혜도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공허할 뿐이다.

믿음이란 주님이 주신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가는 것이며,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사도행전을 써나가는 것이다. 누가 대신 써줄 수 없다. 자신이 써가야 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진짜 믿음이다.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믿음은 사실은 죽은 믿음이다. 아무런 능력이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만 발달되어 말만 무성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실천할 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선친 최우용원장님이 일생동안 변화산기도원 뒷 산에 직접지어 놓고 기도했던 기도처. 낡고 낡은 삶의 자리를 일생동안 몸으로 지켜오셨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가 있다. 자신에게 던져진 숙제를 오직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조카 롯과 헤어질 때, 선택권을 조카에게 먼저 주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권을 먼저 주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힘이 있다고, 좋은 것을 내가 먼저 취하는 태도는 세상 지혜로는 맞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서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희망이 사라졌을 때도 견고하게 믿음을 붙들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 희망이 다 사라졌는데도 말씀을 굳게 잡고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자신의 몸이 죽은 것도 알았다. 아내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을 알았다. 인간의 몸으로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믿음의 견고하여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약속의 말씀이 능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

아브라함은 다 큰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렸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삶으로 드렸다. 아브라함게 믿음과 삶은 오직 하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을 실천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앞뒤이다.. 그래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아~그립다. 자신의 경전을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몸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늘 보고 싶다. 껍데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열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장소와 환경에 좌우하지 않고 삶의 자리를 정결하게 지키며 오직 믿음으로 주의 나라를 세우는 일꾼들이 이땅에 아브라함이며 바울이며 주님의 제자들일 것이다.

최원영  jh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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