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중세 교회가 갈릴레오를 법정에 세움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교회의 법정에서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결코 자기 신념을 포기하지 못 했다. 500년 전 세계는 교회의 권위 아래에서 과학이 무참하게 깨지는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500년이 지난 지금 교회가 과학 아래에서 무참하게 깨지고 있다. 자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음의 결과이다.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과학 교사 스콥스에 대한 재판, 원숭이 재판(Scopes trial, Monkey Trial) 승리 이후로도 진화론은 영향을 확산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대기권 밖으로 올려보내면서 진화론이 창조론을 몰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68혁명 이후로 세계는 급속하게 세속화되었다. 과학에서 정신까지 대변혁을 이루는 20세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진화론의 시작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1859년에 출판한 <종의 기원>에 있다. 다윈의 사고 구조는 생물계에서 물리학, 천문학까지 퍼졌고, 정신계까지 영향을 미쳤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기본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위한 경쟁과 변이였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학계는 분주하게 활동했고, 다양한 화석들을 발굴하면서 결국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발굴했다. 년대는 390만년-290만년까지(100만년 동안)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직립보행”의 신비이다. 오스트랄로페테쿠스는 네발보행에서 두발보행을 꿈꾼 대변혁자가 될 것이다. 그 시초를 “루시(Lucy)” 화석이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1912년 “필트다운 인(Piltdown Man)” 화석을 발표한 찰스 도우슨에 근거해서 정설로 삼고 50여년을 연구했다. 이런 조작은 일본에서도 1981년에 발생하기도 했다. 1997년 중국 북동부 요동성에서 화석이 발굴되었는데 가짜 화석으로 판명되었다. 그 외에도 가짜 화석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진화론의 정진은 쉼이 없다.

198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우리는 점진적 진화론-계통점진이론(系統漸進理論, phylectic gradualism)-을 배웠는데, 지금은 급진적 진화론-단속 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 punctuated equilibrium)-이라고 한다. 중간 화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전환한 이론이다. 단속 평형이론은 1972년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발표했는데, 우리는 1980년대에 계통점진이론을 정설로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진화론”과 “창조과학”의 대조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다. 조덕영 박사가 대표적인 신학자이고 과학자이다. 조 박사는 “창조와 과학”, “계시와 과학의 접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창조신학”을 주장한다. 계시 영역에서 과학 영역을 규정하려는 태도는 지양한다. 그것은 갈릴레오 재판정에서 포기했어야 했다. 종교의 오만은 전쟁과 무지를 양산시켰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맹종에서 식민지 전쟁을 양산시켰다.

그러나 진화론이 정설이라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과학은 불변하는 값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변화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우주의 나이(135억년), 지구의 나이(45억년)는 해가 가면 변화한다. 1년씩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1억년씩 변화한다. 그래서 “우주의 나이, 우주의 크기, 지구의 나이는 알 수 없다.”가 정답일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은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과학은 끊임없이 연구해서 현재의 가치를 수정하는 것이 주요 과업이다. 변화된 답이 나와야 과학이다. 변하지 않는 답을 과학에서 발생시켰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 종교가 될 것이다. 과학의 답은 물론이고 상수(常數)까지 변화할 수 있다. 과학에게 변하지 않는 답은 “종교와 같지 않다”일 것이다. 과학은 “종교가 되기를 거부한 종교”라고 해야 할까?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계시하여, 죄사함과 영생을 이루는 유일한 교범이다. 과학으로 벽을 투과하는 것을 이론으로는 밝힐 수 있다고 한다(참고, <빛의 물리학>, 해나무, 2014). 그러나 죄사함의 구도는 과학에서 밝힐 수 없고, 종교마다 다르다. 기독교 내부에서 조차 통일되지 않는다(참고, <속죄의 본질 논쟁>, 새물결플러스, 2018). 성경적 속죄 구도는 오직 하나이다. 그 구도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기독교의 신학이다.

진화론을 인정하기 때문에 지성인이고, 진화론을 부정하기 때문에 무도하다는 평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학문 구조는 이미 진화론 체계와 정보를 유치원에서부터 교육하고 있다. 그럼에도 창조과학은 어떤 면에서 맹목을 강요하는 부분이 있다. 선한 싸움은 과정도 반드시 선해야 한다. 선한 목표를 성취를 위해서 맹목이나 악을 도입할 수 없다. 무지와 미숙에 의해서 선하지 않음에 용서와 배려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명료한 지적과 비판이 필요하고, 학문은 반드시 자기 맹목을 수정하고 명료성을 추구해야 한다.

필자는 진화론을 일반 학문 체계의 한 분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학문, 사상, 의식을 구성하는 기본 구조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진화론의 가치는 반드시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변화하지 않는 가치 위에 자기 학문, 사상, 의식을 구축하기를 추구한다. 인간은 반드시 제한되지만, 불확실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종교가 주는 신비이다. 과학은 불확실을 미덕으로 삼을 수 있지만, 종교에게 불확실은 불신으로 규정한다. 칼 바르트 신학(신정통주의)에서는 불확실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불가지론). 믿음은 죄사함의 구주와 창조하신 주 하나님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찬양하도록 은혜를 받아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죄인인 자신을 구원하신 구주를 고백함에 인생의 전체를 걸 수 있는 과학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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