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실체되신 주님과 영원한 동행, 그림자 교회

사랑한다. 나의 그림자여!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그대의 동행에 감격한다. 내가 스스로를 숨기면 그대도 몸을 숨겨 나와 일체를 이루어주었음을 감사한다. 내가 어떤 것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대는 불편한 자세를 불평치 않고 모두 따라주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내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늘 검고 희미한 그림자로 남겨져야 함에도 그대는 일거수일투족을 변함없이 내게 속하기를 원했다. 세상이 나를 두려워함은 그대의 그림자가 세상의 어둠을 뒤덮었기 때문이며, 세상이 내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그대가 보인 한결같은 끈질김 때문이다.

그대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라! 그대를 칭칭 감은 검은 그림자의 껍질을 훌훌 벗고 실체인 나와 하나를 이룰 그날에 이르면 그대는 내 존재의 유일한 기쁨으로 모두에게 알려지리라. 그림자는 홀로 행하지 않음을 기억하기에 언제나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설혹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내가 있음을 기억하라! 그림자보다 앞선 것은 실체다. 그대의 귀에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초조해 말거라! 그대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우주 끝까지 퍼져 감을 믿어라! 소리보다 앞선 것은 존재다. 그대는 끝까지 내 실체와 존재의 전후를 지킨다.

찢겨지고 더럽혀도 여전히 사랑하는 교회

안식교 목사인 콜린 스탠디쉬(Colin Standish)의 글 <나의 교회, 오 나의 교회여>를 잠깐 인용한다. 정통을 주장하는 이들의 교회 사랑에 비해 덜하지 않은 순수함이 돋보여 앞부분을 옮겼다. “그대, 나의 교회여! 도대체 어찌된 셈이냐?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고 섬기던 나의 교회여! 그대는 바로 나의 가치와 태도, 나의 신조와 생활 양상, 나의 비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의 성직을 꼴 지운 교회인데, 열정적인 애인처럼 그대는 나를 쫓아와서 내게 구애하고 결국은 나를 차지했다. 열여섯에 나는 그대를 너무 사랑하여 예수님의 도우심을 통해 침례 받음으로 그대를 얼싸안았다. 열여덟에 나는 그대를 너무도 사랑하여 내 생애를 그대와 그대가 드러내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바치기로 선택했다.” 소위 정통 교회에 속한 이들의 교회 사랑이 이 고백에 뒤져서야 되겠는가!

적지 않은 수의 정통 목사들이 순결한 교회를 더럽힐 때 이단에 속한 목사는 교회에 대한 애정을 노래했다. 교회사를 통해 이단을 정죄하고 이단자를 정통의 이름으로 척살했던 일부 정통교회 세력이 실상은 교회의 적이었음을 우리는 뒤늦게 알고 마음 아파한다. 스탠디쉬에게도 변질된 교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에 원래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으로 돌이킬 것을 호소했으리라. 정면 거울에서 실상을 바라보기 어려우면 반면 거울을 통해서라도 제 모습을 가다듬을 수 있어야 옳다. 이태리의 까를로 까레또(Carlo Carretto)도 <나는 찾았고 발견했다>(I Sought and Found)에서 비판하며 사랑하고 타락했으나 순결하며 결함투성이면서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교회를 노래했다. 교회는 아직도 여전한 나의 사랑이다.

고민과 사랑의 애타는 심정으로 보듬는 교회

수년 전에 필립 얀시의 교회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 <교회, 나의 사랑 나의 고민>(Church: Why Bother?)을 선물 받았다. 소책자는 다양한 시각을 통한 교회 파악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를 유형별로 논한 후에 마지막으로 눈물과 고통에 얼룩진 삶의 현장을 스케치하며 하나님의 작은 목소리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배경, 그리고 교회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며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고백적으로 서술된다. 여전히 교회 안에서 고민과 사랑의 시소를 타며 번민하는 목회자는 세상을 위해 세상 까닭에 존재 의의를 갖는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는 주님의 고민과 사랑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오늘의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자라면 교회의 현실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섞였고 거룩함과 속됨이 표정을 달리 한다.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나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다. 내게 공중부양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의식의 날개를 퍼덕여 교회의 첨탑 높이로 오른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교회의 기둥과 지붕을 살펴 쇠락한 곳을 수리하기 위해서다. 역시 사랑의 고민은 즐겁다.

떠나간 지체를 몸에 다시 꿰매는 교회

사랑한다. 나의 지체여! 교회 안에서 형제 된 사랑의 기쁨을 나누던 지체가 교회를 떠났다. 사랑이 부족했는지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매몰찬 등 돌림이 예사롭지 않다. 뒤늦게 만난 사이였기에 하늘 길까지 동행하리라 약조했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세상의 험지를 방황하며 고달픈 시간을 보낼 때마다 우리의 아름답고 존엄했던 삶의 순간들이 어찌 생각나지 않으랴? 나는 그를 위해 마음을 상하련다. 날 위한 상해라면 자해겠지만 다른 이를 위한 고통의 자취는 상해가 아니다. 내가 굳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함은 전적으로 지체에서 떨어져나간 내 가까운 형제의 아픔을 기억해서다.

주님은 한 영혼을 실족시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 영혼의 구원이 천국의 잔치이듯 한 영혼의 파멸은 천국에서 초상이다. 지체는 서로 연결하고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하나 됨에 바늘만한 틈도 허용되지 않는다. 지체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절단되어 신경과 세포가 완전히 죽기 전에 봉합을 해야 한다. 내가 절단되고 분리된 지체를 못 잊어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봉합을 통한 재생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상처(傷處)난 교회 그리고 상처(喪妻)한 주님

사랑한다. 나의 상처여! 나는 나의 사랑하던 아내를 잃었다. 정혼을 했으나 아직 신방을 차리기도 전에 아내를 잃었다. 약혼녀를 정혼녀라, 정혼녀를 아내라 부르는 것은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의 강도(强度)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버렸다. 소박맞은 아내 얘기는 들었어도 아내에게 소박당한 남자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천군 천사들이 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네 영물과 24장로들도 면류관을 벗어 내 앞에 내려놓는데 유독 나의 신부, 나의 아내, 나의 사랑만은 나를 흡족해하지 않는다.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한낮의 땡볕을 맞으며 물 긷던 여인처럼 내 아내는 나 외의 대상과 정분을 나누었다. 김서방(황금), 권서방(권력), 정서방(정욕), 지서방(지식), 명서방(명예), 박서방(박사 학위)을 갈아치우며 욕심 채웠고 지금 동거중인 성서방(성공지상주의)도 그녀의 남편은 아니다. 나는 아내를 잃어 상처했다. 상처한 나의 상처는 깊다. 그런데 잊을 수 없는 내 사랑이기에 난 나의 상처까지 사랑한다. 상처(喪妻)한 고통을 안고 그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다보면 내 사랑이 돌아오려나? 나의 교회가 배역의 걸음을 땔 때마다 나의 상처는 더욱 깊고 아픈 사랑 역시 깊다.

세상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동자, 교회

사랑한다. 나의 눈동자여! 그대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님의 눈동자(apple of the eye)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던 금단의 열매가 무엇일까? 복숭아라느니 사과라느니 한다. 맛있는 부위를 하와가 다 먹고 남은 부위를 받아먹다 껍질 속의 알맹이가 진짜 과일인줄 알고 먹었던 아담의 목에 씨가 걸려 남자의 목울대가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그럴 경우엔 사과씨보다 복숭아씨가 설득력이 있다. 정확한 것은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다는 것이며 줄여서 선악과 또는 금단의 열매로 통칭된다. 눈동자를 “눈의 사과”로 부름은 신기하다. 사과가 상하듯 눈동자가 상하면 사물을 제대로 판별하기는 고사하고 바라볼 수조차 없다.

교회는 세상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동자다(슥 2:8).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다. 주님의 교회가 밝으면 지상의 교회들은 빛 가운데 거한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눈동자같이 지키신다(시 17:8). 교회가 주님의 눈동자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키시되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눈동자”다.

교회가 순결함을 포기하여 안력을 잃어버리자 등경 위에서 밑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하나님의 눈을 상하게 함으로 하나님께 고통을 안겨드렸다. 그 결과로 세상을 살피는 눈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살피기에도 버거워한다. 하나님의 일곱 눈이 아니었다면 교회는 영원히 소경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가 어둠에 휩싸였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 반드시 소수의 남은 자를 남겨주셨다. 그들은 거룩한 그루터기로서 교회의 본질을 죽음으로 수호한 하나님의 씨알이었다. 눈의 동공이었다.

건물은 변하나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

사랑한다. 나의 교회여! 광야 교회를 구성했던 자기 백성을 주님은 기억하고 사랑하신다. 에덴동산, 방주, 성막, 성전을 거쳐 자신의 영원한 거처로 세워진 교회를 사랑하신다. 하늘의 식양을 따라 지은 거룩한 처소들은 시대마다 하나님이 거하신 성소였다. 물에 떠다니던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고 성막이 광야를 행진하면서 멈추다 옮기기를 반복했고 성전에 정착했으나 파괴와 재건을 계속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는 방주의 기능과 성막의 성질과 성전의 정신이 모두 녹아 있다. 교회는 세상의 풍파에 빠지지 않고 떠다닌다. 방주는 부서지고 성막은 낡아지고 성전은 무너져도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하다.

교회는 이동용 성소처럼 세상 도처를 누빈다. 두세 사람이 교회의 이름을 들고 가는 곳이 그 교회의 현장이다. 교회에는 성전에 대하여 주셨던 축복과 영광이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되었다. 교회는 조직이면서 조직을 능가하며 한시적이면서 영원하다.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 사람들이 지체를 이루지만 주님의 몸이다. 주님의 몸은 사람들의 지체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머리 되신 주님을 따라 움직인다. 교회는 완벽하게 주님께 속했기에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주님의 고백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사랑한다. 나의 교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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