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나 문학도에게 들풀과 들꽃은 무한한 신비이고 생명의 존엄이며 인생의 스승이고 아름다움과 황홀함의 샘입니다. 어떤 화가는 평생을 들풀과 들꽃을 화폭에 담으며 살고, 어떤 사진작가는 그것들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는 즐거움으로 일생을 삽니다. 어떤 이는 들꽃 한 송이에서 존재의 시원을 발견하게 될 거라 생각하며 들꽃 한 송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선입견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름 없는 들꽃의 이름을 지어 부르지만 굳이 들꽃에 이름 붙이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들꽃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순간 들꽃은 그 신비와 존엄과 아름다움이 왜곡되고 오해된다고 생각합니다.

18세기 중반까지 합리적인 계몽주의가 기독교와 유신론을 극심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하고 실증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던 합리주의 사상과 사회구조가 리스본 대지진과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실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대신 신비와 상상과 감성으로 보고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같은 변화를 낭만주의 혁명이라고 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내적 느낌과 감정을 지식과 진리의 원천으로 강조합니다.

낭만주의는 룻소의 자연회귀사상의 바탕에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진리의 출발과 원천으로 삼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주의와 계몽주의의 합리성에 식상하고 이성적 폭력에 질식할 것 같은 인간 감정의 반작용이 낭만주의를 발생하게 한 것입니다. ‘낭만적’이란 말은 고대 불어의 ‘로망(roman)’에서 파생되었고, ‘로망’의 고형(古形)인 ‘로망스(romans)’와 ‘로망(romant)’은 라틴어의 부사 ‘로마니스(romanice)’에서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로망’이 처음에는 ‘기이(奇異)’, ‘가공(架空)’, ‘경이(驚異)’, ‘환상(幻想)’등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18세기 말에 이르러 고전주의에 대립된 개념의 ‘낭만주의(romanticism)’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낭만주의는 유럽의 전역을 풍미한 문학운동으로 그 시대의 철학사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는 음악, 미술, 건축,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한때를 풍미한 사조입니다.

이같이 낭만주의가 포괄하고 함의하는 다양성 때문에, 그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문학사조의 반동으로 일어난 사상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고전주의가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고 그 존재 자체의 합리성과 감각적 경험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는 사실은 신뢰하지 않았는데, 낭만주의는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낭만주의는 세계를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여 관념의 세계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 감각성보다는 관념성을 강조합니다. 고전적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형식과 내용의 균형, 대상의 유형화 등의 특징을 지녔고, 낭만주의는 자유분방함이 예술적 특징입니다.

하이네는 “고전적 예술은 한정적인 것을 묘사하고, 낭만적인 예술은 무한을 암시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명상록 Speculations, 1924)』을 쓴 흄(Hulme, T.E.)은 인간을 우물에 비유하여 낭만주의는 “가능성이 가득한 저수지”로 보고, 고전주의는 “유한적이고 고정된 창조물”로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낭만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무법칙성과 신기성을 추구하며 이상이나 동경이나 신비감으로 사실성에 접근합니다. 낭만주의의 세계관의 여러 특징은 주관적, 개성적, 공상적, 신비적, 동경적, 과거적, 혁명적, 정열적, 전원적, 원초적……등과 같은 인간의 감정적 속성을 그 핵심 개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법과 질서를 존중하던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오면 감상, 서정, 감각, 괸념, 퇴폐, 저항, 탐미, 관능, 우울, 비애, 환몽 등의 병적이고 무질서한 경향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에게 감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의지로 감정을 조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퇴폐와 무질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낭만주의가 관능과 퇴폐와 무질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어어마허가 낭만주의를 받아들여 생애 내내 낭만주의와 유신론을 조화시켜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종교를 이성에 복속시키려는 합리주의자들이 종교를 왜곡시키거나 버리지 말라는 설득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감정”이라고 정의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은 이해보다는 마음의 문제이며 이성보다는 신앙의 문제로 봄으로 객관적 계시보다 개인의 내적 체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그리스도인의 감정에 대한 원시적 해설”이라고 하여 성경을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사람의 느낌이나 직관의 권위에 부속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시해 주신 신적 권위의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진리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낭만주의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성경 계시가 최종적이며 절대적 권위라는 성경 자체의 증거를 외면하고 사람의 내적 의식과 느낌 혹은 직관이 진리의 궁극적 중재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서 계몽주의의 이성은 낭만주의의 주관적 직관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감정적인 낭만주의적 경향의 신앙이 합리적인 계몽주의적 신앙보다 신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모두 성경의 초자연 계시를 거부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성경의 초자연 계시를 부정하는 낭만주의의 영향은 19세기와 그 이후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우어, 스트라우스, 하르낙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초자연 계시를 부정하는 면에서 낭만주의의 대를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초자연계시를 거부하면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게 되고 게다가 이성보다 감정을 강조하게 되면 존재와 보편 가치에 대한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낭만주의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는 뿌리 없는 나무나 기초가 부실한 건축물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외형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지만 도덕과 질서와 보편가치를 참담하게 무너지게 합니다.

1830년대에 이르면 낭만주의적 관념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집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는 동안 철학과 사상과 문예사조는 사람과 자연을 강조함으로 고대 자연주의로 회귀하는 길을 닦았고 그 과정에서 사상가들은 성경을 이용하고 활용하면서도 점점 하나님을 그들의 영역에서 밀어냈습니다. 낭만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할 때 포이에르바하가 낭만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철학적 접근방법을 제시하여 다수의 지지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신학을 연구하였으나 헤겔의 권고에 따라 철학을 하게 되었는데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헤겔까지 비판하여 독일 학계에서 학문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낭만주의적 철학 모두를 배격하고 진리와 존재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연과 사람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으며 “자연과 사람의 경계선을 넘어가서 추구하는 해결은 무엇이든지 가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초자연적인 모든 것은 부인하였고 실재하는 것은 물질로 구성된 인간과 자연 뿐이라고 하였으며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하였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함에 있어 “사람은 사람에게 신이다.”라고 하여 인간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취향과 욕구에 따라 행동하면 되고 우주 안에 아무런 윤리적 기준도 성격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유물론으로 자연과학 학계에서 지지자가 급속도로 불어났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마치 담즙이 간에 대하여, 소변이 신장에 대하여 갖는 관계와 같이 뇌와 관계를 가질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21세기의 지성인들에게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자연주의로 회귀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신을 부정하고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으나 현대 자연주의에 오게 되면 인간 존재를 물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하여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인간을 최고의 자리에 앉히게도 되고 또한 한갓 물질에 불과한 존재로 보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과 사물의 가치는 독립적으로 평가될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도달하지 못한 들풀의 영광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고 그 들풀의 영광도 인간에 비기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질 존재일 뿐이라는 것도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내려지는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들풀에게 입혀주신 영광과 그 들풀의 생명이 인간 생명을 비롯하여 모든 존재와 연계되어 있음을 어렴풋이나만 감지한 시인들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해 통치되고 보살펴지고 있음은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 존재에 대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인간을 천하보다 존귀한 존재로 평가합니다. 다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인간 존재는 한갓 먼지일 뿐이라고 평가합니다. 그 외에 지렁이 같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도 합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존재와 자격과 능력 면에서는 눈곱 만큼의 가치와 가능성도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긍휼로 찾아오시고 사랑으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의 체질이 먼지뿐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은 이 깨달음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3-18).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