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사역이다. 그리고 구원 후 과정도 하나님의 전적 사역이다. 하나님의 전적 사역은 은혜의 선물을 제공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을 믿음으로 받은 것이 구원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음과 은혜로 구원 얻음이 동일하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구원을 진행하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이나 과정에서 인간의 의도나 능력이 개입되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즉각 ‘신인협력구원설(Synergism)’이 되기 때문이다. 신인협동설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이 주장했던 것이고 정죄되었다. 신인협동설은 인간자력구원설(Autosoterlsm)인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개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원에서 탈락”에 대한 주장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열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는 최종의 때에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벧전 1:17, 계 2:23, 18:6; 20:11-15; 22:12 등, 고후 5:10, 갈 5:19-21에 행위로 최종 심판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죽은 믿음(약 2:17) 등에서 “행위없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말씀했다.

이러한 성경 구절이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의 정당성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서로 상치되는 논지에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는 것을 “성경적”이라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두 논리가 상치될 때에는 반드시 한 논리를 채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중세 철학에서는 두 논리를 진리로 채택하는 경우가 두 체계에서 발생하기는 했다(이중진리설). 그러나 한 학문에서 두 진리 체계를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한 논리 체계에서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구원의 성취는 양립할 수 없다. “신학은 논리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이 말하는 행위 자체가 논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은 교회에 거짓 복음이 침투했을 때에 사도들이 울린 경종이다. 위험을 알리는 경종을 진리 체계로 세우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거짓 교사를 분별하며 경계하고 분리하라는 복음을 참 교사,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건강한 자에게 항암치료를 하는 것과 같다. 항암치료가 생명을 살리는 약이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 처방받으면 더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은 복음의 시작과 함께 성경에 있다. 교회의 시작,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도 거짓 교사(외식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경고와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경계가 있다. 그런데 그 성경 본문으로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거짓 가르침을 양산했다. 반-펠라기우스주의가 공식적으로 정죄되었지만 인간의 영적 탐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질 수 없고,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하고, 반-펠라기수우스주의를 정죄했음에도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쉽게 이단이 사라질 것이라면 한국에 수 많은 이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이단의 공통점은 자력구원, 협력구원이다. 현대주의의 심각한 위험은 그것을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둔갑시키는 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협력구원은 그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가면서 하나님의 행위로 판단하는 것이다. 현대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 구원을 선포하면서도 자력구원(협력구원)을 말하는 것이 상례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민감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구원에서 왜 탈락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대에서 부(不)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 너무나 안일하게 방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절대로 참 평안을 스스로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위로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위로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분석이 나왔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방임주의, 열광주의, 율법주의 등이 있었다. 잘못된 것을 수정하는 것과 옳은 것을 유지(계승)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하는가? 구원은 복음의 바른 이해에서 비롯된다. 복음에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구원을 시작하셨고 진행하심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을 주장할 때에 하나님의 전적 구원의 가르침이 부족하거나 지향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지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적 구원의 시작은 16세기에 형성되었다는 “이신칭의”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트렌트 공회의에서 정죄한 교리이다. 그럼에도 당시 개혁파들은 그 정죄된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확고하게 지켜 교회를 이루었다. 최덕성 박사는 김세윤의 신학 견해가 트렌트 공회의와 유사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는 최소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이 기독교 신학에서 병존할 수 있다는 주장만큼은 허용하지 말자.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는 신학 진영이 많다. 그러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든지, 구원에서 탈락 가능성을 주장하든지, 양자택일을 주장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견지하는 매우 귀한 하나님의 요새이다. 이것을 “근본주의”라고 집중공격하기도 한다. 이단들은 자기가 이단일지라도 그 집단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데, 진리의 사람이 진리를 붙잡음에 이단보다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골고다에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구원하신 구원경륜을 보라! 그 십자가의 어린양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

“진리이면 붙들고 거짓이면 버리라.” 판단이 서지 않거든 진리를 주장하는 소수(少數)의 편에 서라. 다수가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혹시 다수가 진리를 주장한다면 그대는 침묵하라.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