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타락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저희에게 나으리라"(벧후 2:21) 타락은 원래 좋던 상태에서 좋지 못한 상태로의 전이(轉移)를 의미한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목한 후에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들의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야기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신 그 은혜를 다시금 짓밟은 것이다. 또 하나는 그들이 다시 회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한번 경험했던 은혜의 기쁨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 기쁨과 감격을 또다시 누리기에는 그 은혜가 진부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타락한 자들이 다시 돌아오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더욱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지식으로 멸망의 선봉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가 일생동안 성숙해 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낙심이 성장의 아픔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낙심하는 시간이 없이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방법이 없다. 낙심은 신앙생활의 낯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부이다.

낙심이 타락으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란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란 관점에서 평가할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된다. 그분으로 하여금 원하시는 일을 원하시는 시간만큼 하시도록 하지를 않고, 우리 스스로 일정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스케줄을 따르기를 원한다.

만약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는 교만해지고 자기만족에 빠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잘못된 일을 행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자연히 우리는 낙심하게 된다. 이때의 낙심은 묶였던 성장을 헤치고 계속적인 성장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막대기가 된다.

그들의 낙심을 거짓된 쾌활함으로 위장하거나, 그 충격을 줄이기 위하여 기분전환을 모색하는 사람은 결코 성숙해질 수 없다.

낙심이 될 때, 화를 내거나 그것을 부인하면, 그것은 사단에게 붙잡혀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지렛대로 이용된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의 선물로 환영하면, 그것은 우리를 깨우치는 일을 한다.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과, 미숙한 신앙생활을 계속하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극을 받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고자 하시는 새로운 일에 다시 우리 자신을 열게 된다. 낙심에서 가야할 길은 타락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상담자는 타락한 자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세심한 고려를 해야 한다. 그들을 치유하기란 결코 쉽지 않고 많은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의 근본적인 품성은 교만이다. 그들은 마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양 행동한다. 이들의 교만은 자연적인 인간이 지닌 교만과는 내용을 달리한다.

자연적인 인간, 곧 하나님의 은혜를 아예 알지 못하는 인간의 교만은 무지로 말미암은 교만이지만 타락한 자의 교만은 풍부한 지식을 기초로 한 교만이다. 이러한 교만은 더욱 치유가 어렵다.

상담자는 그들의 교만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산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에 불과함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이와 유사한 병에 걸려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은혜로부터 멀어져 자신의 교만 가운데 생활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설득하는데 사용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드러운 말씀"이 아니라 "저주와 심판의 말씀"이었다. 상담자는 물론 타락한 영혼에 대해 깊은 동정과 자비심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야한다. 굳어진 바윗돌을 깨는 것은 날카로운 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굳어진 마음을 깨는 것은 부드러운 말이 아니라 그들은 마음을 찔러 쪼개는 심판의 메시지이다. 상담자는 때로는 듣는 자여야 한다. 그들은 영혼들의 상한 마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상담자는 말하는 자이다. 타락한 자의 경우 상담자는 더욱 말하는 자여야 한다.

나사렛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기다가 이제는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원장일을 보고 있으며 여러군데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늘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일에 관심이 있으며 어려운 문제 함께 의논하고 상담하기를 좋아한다. 미 공인상담사및 코칭 자격을갖고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나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고 타락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말했듯이" 상담자는 타락한 심령의 내담자를 향해 말해야 한다.

요즘 목회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돈과 세상성공과 출세에 도전하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레이스를 벌리고 있다. 세상 시류에 연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면 못할 짓이 없다. 여기서 돌아서야 한다. 청빈한 목회자 얼마나 멋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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