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교수의 사상 사색(3) 한국교회는 구원파적 구원론이 될 수 없다

필자는 “한국교회 구원관이 구원파적 구원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부를 표현한다. 김세윤 교수가 대표적으로 시작한 것을 여타의 연구자들이 반복하고 있다. 필자는 <현대 칭의론 논쟁>(CLC, 2017, 155쪽)에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인터넷신문 본헤럴드에도 “한국 교회는 구원파적 구원론을 갖고 있는가?”(본헤럴드, 2018.07.06.)라는 내용을 제시했다.

사실 김세윤 교수는 구원파적 구원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필자는 구원파의 구원론을 1세기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으로 인정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구조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풍토는 한국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구원론)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학교에서 구원론은 구원의 서정이나 구원사(Ordo Salutis, Historia Salutis)를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교의 구원론은 지나치게 구원의 서정에 편중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 장로교 구원파는 구원협약(Pactum Salutis)까지 있다. 그런 신학 교육에 구원파적 구원 이해는 자리 잡기 어렵다. 오히려 구원파적 이해는 복음 전도 현장에서 용이한 복음 전도를 위해서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교 교육과 복음 전도 현장의 불일치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신학 교육자가 한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류에서 떨어졌을지라도 한국 신학의 주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 신학자는 한국교회 신학의 문제점에 가장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 오히려 필자와 같은 산골의 백면서생이 한국 신학과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 그런데 최고의 신학자, 세계적인 신학자,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명한 신학자의 질타를 기쁘게 받는 상황은 어찌된 일일까? 필자는 영적 매조키시트(Spiritual Masochism)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구원파의 구원 이해”는 오래전에 한국 교회가 정죄한 수준이다. 그것은 1세기 구원을 구원받을 사람이 자기를 위한 구원 사건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구조이다. 즉 구원파 구원 이해의 문제점은 “행위 없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구원 이룸이 “인간의 작의적인 결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 후에 회개가 없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는데, 현재 구원파에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에 일괄로 단정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즉 회개를 인정하는 구원파가 있다는 것이다. 구원파에 대해서 정죄한 결정적인 문제는 구원을 복음을 듣고 스스로 깨닫고 영접하는 방식에 있다.

그런데 구원파적 구원 도식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에 항상 잔재했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아니라 세계 교회에 늘 있어왔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한 예를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라고 생각했다. 이 용어는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 -1999)이 <그리스도와 시간, Christ and Time>(1950년)에서 ‘영원’을 향한 ‘시간’(카이로스)을 창조-타락-구속-완성이란 직선적-구속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역사의 ‘중간인 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죽음-부활로 성취되었고(이미), ‘종결점’인 재림 사이의 긴장(그러나 아직)을 도식화한 것이다. 김세윤은 ‘이미’를 ‘D-day’로, ‘종결’을 ‘V-day’로 도식화해서 소개했다. 그 사이에 있는 (아직 아니)의 긴장 관계를 소개했다. 그리고 구원받음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으로 소개한다. 믿음으로 무한한 자원을 의지하며 사는 삶이라는 김세윤의 주장이 오히려 구원파적 이해와 유사하다. 그것은 예수가 그 길을 열어놓은 것을 믿는 것이고, 다만 ‘아직 아니(not yet)’에서 긴장 관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쿨만의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를 김세윤도 적극 활용했다. 쿨만의 도식은 구원사 혹은 구속사(Heilsgeschichte, salvation-history)이다(Saivation in History, London: SCM, I967). ‘구속사’는 경건주의 학자 벵겔이 최초로 사용했다. 구속사는 시간(역사)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탐구하는 것인데, 쿨만을 넘어서 판넨베르크에 와서는 역사를 계시로 보는 것까지 확대되었다. 구속사 학파의 문제점은 시간 이해에 전념하면서, 신자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강조하지만, 정작 한 개인 안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깊은 인지가 없다. 시간과 공간 이해도 중요하지만, 인간에게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 복음을 믿는 성도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구원파적 시간 이해는 쿨만의 시간 이해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쿨만이 이해한 시간은 1세기(시간) 예수의 죽음, 부활로 그 후 인류라는 공간은 ‘이미(already)’가 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를 믿어서 ‘최종점’이 아닌 ‘아직 아니(not yet)’에서 살아야 하는 숙명적인 상태가 된다. 거기에서 ‘이미’를 인지하는 것과 최종이 아닌 ‘아직 아니’의 긴장 관계를 주장한다면 구원파적 이해와 거의 차이가 없다.

한국교회의 구원관은 벌코프 조직신학(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의 구원의 서정에 근거한다. 조직신학 구원론, 구원의 서정은(박형룡 박사의 견해) 소명, 회심, 중생,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이다. 매우 간략한 순서(Ordo)인 것 같지만 매우 세밀한 과정이다.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모든 것에 세밀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은 구원의 시작이 소명(Calling)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소명은 1세기에 승천하신 천상의 주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사건이다. 그 부르심을 받았고 유지하기 때문에 칼빈은 반복적으로 “천상적 교리(heavenly doctrine)”라는 어휘를 <기독교강요>에서 반복했다. 루터는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김용주. 필자는 생소한 의)”라고 했다.

“내가 믿어 구원되었다”면 구원파적 구원관에 있는 것이다. “내가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문장을 쓰기도 한다. 이것은 매우 비합리적 문장이다. 주격이 수동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예수를 믿었다”라는 것이 부담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른 믿음 문장은 중문으로 사용해야 한다. “내가 믿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단순 문장을 제언했다. 그것은 능동형이지만, 뒤의 문장(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 암묵적으로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명확하다. 다만 은혜에 대한 이해가 다름이 있다(로마 교회의 부가적 은혜, Donum superadditum). 개혁파에서 구원은 전적 은혜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심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스스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방식은 구원파적 이해이고, 그러한 유사한 주장(믿음과 선택)을 김세윤 교수도 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에 이신칭의에 대한 대대적인 토론이 있었다. 필자는 1517년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세우는 것이 4-5세기 고대교리와 바르게 연결되고, 1세기 성경과 주 예수의 가르침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최덕성 박사가 김세윤 교수의 신학이 16세기 트렌트 공회의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논문을 발표했다(“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과 관련하여”, <역사신학 논총> 30권, 2017). 해 아래 새 것이 있을까?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형람서원 대표, 한영대, 총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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