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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목사 칼럼】 敎會-사랑한다 교회여 4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한기총-한교연-한교총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교회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하면 기총소사가 생각난다. 대량살상에 사용되는 무기의 발사 장면이다. 한기총이 미덥지 못해 한교연(한국교회연합)이 태어났다. 전교련을 상기시키거나 60년대 말엽 고교, 대학가를 사찰하기 위해 현역 군인이 학생들을 훈련시키던 교련을 생각나게 한다. 한기총이 가룟유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을 뻔했던 조직이라면 한교연은 사생아다. 둘 다 영원히 퇴출되어야 하고 조직에 몸을 담고 영혼을 더럽혔던 중량급 목회자들은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던 나아만 장군처럼 회개의 검증을 거치게 해야 한다. 아마 저들은 끝까지 당당하리라. 죽어가면서도 한국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살신성인했노라 잠꼬대를 하리라. 주님 앞에서 유구무언일 그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펼쳐지니 더욱 무거워지는 마음이다.

한기총과 한교연은 하나 되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아예 둘 다 사라져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그럴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어도 한기총과 한교연은 묵묵부답인 채 질긴 목숨을 이어갈 것이다. 2017년 그 뜨거운 여름날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몇 개 교단 대표들이 일치의 구호를 내걸고 새로운 분열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한기총과 한교연을 아우르겠다며 한교총(한국교회총연합회) 발족의 의미를 강조했지만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는 조직의 탄생을 달가워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임마누엘의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벌이는 이런 행태는 그야말로 엽기적이라 할 만큼 가관이다. 성이 같은 걸 보면 배다른 형제인가 본데 어미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다. 조국이 망하거나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그들이 하나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주님이 신호를 보내도 누구 하나 알아채는 이가 없으니 주님도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엘리야도 엘리사도 나아만도 없는 교회

조국교회에 엘리사가 없으니 나아만 같은 순종의 행위도 없을 것이다. 엘리사가 없는 것은 그에게 갑절의 영감을 얻게 한 스승 엘리야가 없기 때문이다. 전설적 부흥사의 후계자라며 누구는 그분의 성경책을 물려받았고, 어떤 이는 그분의 가죽 혁대를 물려받아 찼고, 또 어떤 이는 비밀리에 안수를 받았다며 한국 부흥사의 정통 후계자를 내세우는 이는 많아도 엘리야 같은 종의 후계자는 없다. 지금 한국교회에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부흥사가 있는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들 것이다. 가난을 삶으로 익히며 선함과 순전함으로 종의 길을 고수했던 그분의 삶이 어른거린다. 조국교회의 어른자리를 차지하고 내세우는 인물은 많으나 모두 영적으로는 어린애 같은 것이 소위 지도자들의 확연한 모습이다.

세태를 거스를 산 송어 같은 소강(小强) 교회

예수의 복음은 근본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 믿는 자들이 복음을 둘러싸고 서로 옳다며 싸웠지만 변방에서 주변적인 것들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그 이후 물댄 동산에 피어난 각종 야생화들처럼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신학들이 나타났다. 얼마는 사라지고 얼마는 살아남고 얼마는 계속 자신들의 정당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가 놓친 것은 예수의 바른 영성이다. 그분이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를 논하기 전에 그분이 역사의 현장에 몸을 나타내 살고 사역한 모습을 간과했다. 학문적으로 추적하여 해체하고 분석해 의미를 찾고 봉합하여 여러 각도에서 살펴 형상화했지만 예수의 삶이 되고 사역이 된 영성의 껍데기조차 제대로 파악치 못했다.

예수는 생명인데 교회에 생명이 없고 목회자나 신학자의 영혼에 예수 생명이 없다. 주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걸었던 파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한다. 예수의 신비를 죽였기에 신비주의가 날뛴다. 예수의 영성을 외면했기에 영성주의가 호황을 누린다. 주님의 공동체가 작고 강건했음을 간과했기에 크고 허약한 교회가 양산된다. 건강한 작은(强小) 교회야말로 모든 것을 대형화하는 세태를 거스를 한 마리의 산 송어처럼 희망이다.

한 생명을 열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교회

예수 목회를 하라! 작고 큼에 마음 뺏기지 말고 근본에 충실하라! 근본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에 쏟는 정성이다. 하나를 제대로 얻으면 천하를 얻음인데 전심전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 천하나 열 천하나 결국은 궁극적인 대(大) 천하의 일부다. 예수 목회는 자신을 버려 남을 구하는 희생의 호흡 같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치고 빠진다. 살만 하면 치고 어렵다 싶으면 도주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치고 빠지는 것은 마치 호흡의 들숨과 날숨처럼 일관되어야 한다. 영혼의 반응이나 환경과 형편의 격차에는 무감각해야 한다.

예수 목회를 하자! 엎드리면 기도요 눈을 뜨면 말씀을 펼친다. 기도 속에 자신을 익히고 말씀으로 다듬는다. 하늘에서 비추는 빛이 없으면 보지 않고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없으면 귀를 막는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셨고 입에 담아주신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 목회를 하라! 적은 추종자를 잘 건사하고 큰 적대자들로 인해 주눅 들지 말라! 모자라면 하나님의 기적을 볼 것이요 대적이 크면 밥으로 변할 소재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한 영혼을 기뻐하지 못하면 두 번째 영혼이 비껴간다. 사탄은 하나를 멸시해도 하나님은 하나를 귀히 여기신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다.

대형교회-작은교회 동등한 우주적 교회

주님이 나를 우주의 중심 삼듯 나 역시 주님을 그리해야 하고 내게 붙여주신 영혼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짐승의 가격은 차이가 나도 영혼의 가격은 동일하다. 의인이나 죄인의 영혼 무게는 같다. 대형교회 사역자나 작은 교회 목회자나 영혼가치는 균등하다. 엄지는 제가 제일이라 우기고 검지는 중요한 것을 가리키는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장지는 자신의 길이로 중요성을 주장하고 약지는 결혼반지를 낄 만큼 둘을 하나로 엮는 힘이라 너스레를 떠는데 변변한 이름조차 갖지 못한 새끼손가락이 한방을 먹였다. “내가 없으면 니들은 죄다 병신이여!”

아주 작은 교회도 있어야 우주적 교회로서의 교회에 보편적 건강을 유지한다. 교회는 두세 사람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자라 백이 되고 천이 된다. 성장은 자연의 한 현상이다. 교회도 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간혹 성장은커녕 줄어드는 교회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생존의 턱걸이를 하며 사투를 벌이는 교회가 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렇다 해서 비정상으로 몰아붙이기에는 사역자가 너무 정상이다. 사역자로서의 인품이나 능력을 보면 선두권을 형성하지만 그의 목회현장은 보잘것없다. 그래서 작은 교회의 가치가 보존이 된다.

강함이 응축된 희망의 작은 교회

작은 교회가 과연 희망인가? 아니다. 작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작은 교회끼리 목소리를 높여보았자 금세 큰 소리에 함몰되어버린다. 잠깐 꿈틀대다가 잠잠해진다. 본인이 지치기도 하지만 세상인심이 고개 돌려버린다. 어쩌다 크면 생각이 커버리고 욕심이 커버려서 얼마 전까지 익숙했던 작은 옷이 맞지 않고 불편하다. 작아도 주눅 들지 않는 신선함 때문에, 혹은 일말의 동정심도 작용해서 그들과 어울려보지만 늘어나는 건 엇박자뿐이다. 작으면서 옹졸하지 않기란 어렵다. 작으나 당당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격과 성품으로 굳어지기 전에는 그저 시늉에 불과하다.

작아도 강해야 한다. 작지만 끈질겨야 한다. 첨단제품에서 선두를 지키려면 작아도 강해야 한다. 컴퓨터도, 카메라도, 첨단기기도 모두 그렇다. 작은 것은 기술이고 강한 것은 성능이다. 갈수록 칩의 크기는 작아져도 성능은 확대된다. 원자폭탄보다 강한 것은 수소폭탄이다. 분열보다 강한 것은 응축이다. 실력을 발휘하기보다 감추기가 어렵다. 긴 문장보다 어려운 것은 단문이다. 일본의 단시처럼 한 줄에 한 쪽을 담는 것이 기술이다. 겸손은 작은 교회 목회자의 최대 강점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도 작아질수록 강함이 응축되어야 한다.

바른 정신-맑은 영성, 함께 모이는 작은 교회

협동조합은 좋은 예다. 작은 교회 두셋 또는 서넛이 함께 하나의 사역을 추구한다. 모자라는 것은 아이디어요 정신이지 돈이 아니다. 아이디어도 머리 굴림의 결과가 아니라 천상의 빛에 쏘임 받은 영감으로서의 아이디어다. 바른 정신과 영성으로 물샐틈없는 그릇이 준비되면 돈은 물처럼 흘러든다. 돈은 눈이 없고 발이 없지만 날개가 있어 향기 있는 곳에 벌 나비가 찾아들듯 그렇게 있을 곳을 찾아 머문다. 향기가 있어도 퍼지지 않으면 벌 나비가 찾지 않는다. 작은 교회들의 향기를 사방으로 퍼뜨리는 것은 성령의 바람이다. 성령의 바람은 신묘막측해서 찾아들 벌 나비 떼들에게로만 확산시킨다.

친밀과 사랑으로 연대를 이루는 교회

엘리트는 수가 적어서 엘리트다. 모두가 엘리트면 그것은 이미 엘리트가 아니다. 교회가 영적인 거인을 배출하려면 골리앗 같은 거구의 몸체를 불릴 것이 아니라 다윗의 조각상처럼 작고 아담하게 다듬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전거를 타고 늦게 도착하기다. 고도의 기술력과 통제력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작지만 강한 교회의 형성이 가장 힘든 목회다. 주님을 목회자로 볼 때 그분은 참으로 힘든 사역을 감당하셨다. 3년간 심혈을 기울인 그들은 영적 거인이 아니었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들은 중심을 벗어나 생존의 터전을 위해 주변으로 꼭꼭 숨었다. 그들의 진가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재회와 성령과의 첫 대면으로부터 발휘되었다.

열둘을 주님의 제자로 양육하며 최저한의 생활이 보장될 그런 목회는 환상에 불과할까? 주님의 사역과 현대 목회와는 상황이나 성격에 있어 판이함을 주장할 목소리가 넘쳐난다. 시대적 차이나 사역의 성격상 구별되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사역 정신이나 영적 자세마저 다를까? 결국 가정교회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천국가족으로서의 유대감과 친밀감, 축제 같은 예배가 보인다. 사역은 몇 가정이 함께 진행하면 된다. 숫자가 작아서 가족이 아니라 가족 간에 나누는 친밀감과 사랑의 연대감 때문에 가족이 된다. 가족을 이루기 가장 좋은 소형교회에 다툼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면 최악의 양상이다. 대형교회에 사랑의 친밀감과 일치의 연대감이 굳건하다면 최상이다. 역시 관건은 규모의 대소가 아니라 친밀과 사랑에 있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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