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107) - 욥기(10)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부회장 KC대 전 총장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 보시기만 하시나이다”(욥30:20).

욥이 고난을 받으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삶과 교훈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친구들,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이 우리 삶의 교훈을 깨닫게 하는 것과 유사할까. 사람마다 다 그 특별한 자신만의 길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겪는 고난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특별하다. 그래서 삶의 고난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있을 것이다. 욥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고난과는 다른 특별한 고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갖는 일반적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욥기 본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인과응보 사상으로서 욥기의 친구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는 기조(基調)를 말하며, 세 친구들은 그 사실을 계속 말하고 있다.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 하니라”(빌닷, 욥18:19,21).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응보사상이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계속 유지되고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욥은 형식적으로 그들과 서로 연관되어 말하고 있을 때조차도 다른 말을 하며 관련되어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반박하며 말하고 있다(욥18:2;19:2;욥21, 20장).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 하는고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욥16:2,3). 욥이 친구들의 말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나 친구들이 욥의 말에 대응하는 것을 분간하여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욥기 4장에서는 엘리바스의 연설로 대화가 시작되고 있지만, 이미 욥기 3장에서 욥은 탄식의 독백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대화이며 그 응답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보다 심각한 논쟁의 문제는 욥의 반대자로 서서 하나님과 반대하여 세 친구와 연합하는 동안인지, 그리고 그들의 “인과응보 교리”를 수용하는 것이 또한 각기 그들 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즉, 엘리바스는 위엄 있고 신중하며 소발은 무뚝뚝하다. 빌닷의 성격은 어느 정도 그 둘 사이에 있는 위엄스러우면서 퉁명스럽다.

전반적으로 대화는 절정을 향해 움직인다. 친구들은 위로의 말로 시작하고(4:1), 개인적인 고소로 끝맺는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22:4,5). 욥이 결국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태어난 것도 저주하는 과정(3:3; 6:8;10:18이하)은 하나님이 약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소하고, 무죄한 자의 죄를 선언하고 있다(9:20). 하나님은 자신의 돕는 자라는 희망을 가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욥 자신의 운명에서 첫 번째 계명, 하나님 신앙에 대한 명령을 적용함으로써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있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었으며, 이를 통해 거의 역설적인 확신을 가진다. 그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느 누구도 중재할 사람이 없다는 깨달음을 갖는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호소할 보다 높은 하나님의 중립적 법정이 있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법정은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욥9:32-35).

결국 욥은 하나님의 대화 속에 자신의 죄를 찾으려고 한다고 하면, 결국 찾아질 것이지만 하나님과 자신은 질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법정으로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인간의 죄를 다룰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은 본래 그런 파렴치한 범죄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욥과는 다른 인간적인 대화나 사람들의 추측과는 다른 자신만의 변론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 나가야 할 사람들의 죄의 실존이 있다. 나다나엘 호돈의 주홍글씨에서는 청교도 사회의 윤리를 보여준다. 죄를 지은 딤스 데일 목사는 늙은 의사의 부인 헤스터와 사생아 펄 앞에서 결국 자신의 죄를 보여주며 죽는다. 사람들 앞에 간통자라고 낙인찍혀 살아가는 헤스터의 불행을 보며 죄를 지은 고독한 딤스 데일 목사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주홍글씨다. 청교도 사회에서 가슴에 간통자(A)라는 주홍글씨를 붙이고 살아가는 여자의 처절함, 그리고 거룩한 목사의 죄지음의 고뇌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는 간음한 여자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예수의 모습은 중요한 교훈을 보여준다. 예수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는 말을 한다. 그 항변이 무엇인가? 예수의 그 대변 속에서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구든지 어느 누구를 우리가 정죄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욥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찾아 고백록을 써가야 하는 존재이며 죽을 때까지 죄와 씨름하며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찐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욥9:28,29).

욥은 하나님을 불러 법정으로 간다(13:3,18; 23:4). 욥은 친구들의 충고를 좇아 처음에는 그의 호소(나를 홀로 두소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서 회개하는가? 욥은 사망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벗어나게 하나님께 자신을 숨겨달라고 청한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욥을 친절하게 기억해 달라고 한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소서”(욥14:13). 다른 말로 그를 핍박하는 하나님에 대하여(16:9;19:6;21장), 나의 의를 빼앗았다고 한다(27:2). 욥은 하나님께 고통과 질곡의 순간에 호소하며 욥의 권리를 위해 서있어 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며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시게 행하셔서 자신에게는 자의적인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욥은 다시 한 번 간구한다. 욥은 자신을 선으로 이끌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호하시는 분이 높은데 계시니라”(욥16:19).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욥은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였고,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았고 힘들지만 경건함을 가지고 나갔던 것이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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