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교회력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성탄주기를 살펴 보자. 교회력의 두 기둥은 부활주기와 성탄주기인데, 성탄주기는 부활주기보다 이후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달력으로는 부활주기가 먼저 오지만 한 해 교회력은 성탄주기로부터 시작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시작이니 말이다. 성육신을 묵상하는 중요한 절기인 성탄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니케아 신경에서 더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나셨으나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우리는 성탄주기를 통해 묵상한다.

성탄주기는 준비절기인 대림절과 축하절기인 성탄절, 주현절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대림절을 살펴보자. 대림절(Advent)은 말 그대로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기간이다. ‘기다림’이라는 용어는 라틴어(Adventus)에서 왔는데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용어였다. 제물을 바칠 때 신들이 방문한다는 것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로마제국의 황제는 이 용어를 차용하여 사용했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신민을 방문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자신의 공식적인 방문을 신의 방문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교회는 이 용어에 세례를 주어서 성육신 사건에 사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땅을 방문하셨기 때문이다.

4주간이 대림절의 기간이다. 부활을 기다리는 기간이 40일인데,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기간이 4주간에 불과하니 성탄절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대림절은 금식하는 기간으로 생각했고 매일 예배에 참석했다. 대림절은 사순절기간처럼 회개하고 금식하면서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부활절에 세례 받지 못한 이들이 성탄절에 세례 받도록 기회를 주었다. 고대 교회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했는데 이 대림절에는 월요일까지 금식했다. 이렇게 일주일에 삼일씩 금식했기에 그 금식일들을 제외하고 40일을 대림절로 잡기도 했다. 그래서 대림절은 11월 11일에 시작하기도 했다. 대림절을 사순절 못지 않는 절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10세기쯤에는 대림절이 4주간으로 줄어들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방문을 준비하는 절기이다. 대림절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묵상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대림절은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이 땅에 오신 것을 묵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성탄절도 마찬가지이다. 대림절은 과거를 회상하는 절기일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절기라는 사실이다. 즉,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이지만 시간의 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갈 4:4) ‘이 모든 날 마지막에’(히 1:2)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방문은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최종구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대림절과 성탄절이 연중 달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림절의 4주간동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된 각종 말씀을 묵상한다. 대림절에 읽고 묵상하기 좋은 말씀은 구약의 선지서들인데, 이사야서 말씀이 대표적이다. 첫째주일과 둘째주일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묵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하다가 돌아올 것을 알리는 말씀이 좋을 것이고,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회개하라고 외친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셋째주일은 기뻐하라고 하는 빌립보서의 그 유명한 말씀(4:4)에 근거하여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로 불리기도 한다. 금식하면서 회개하는 기간에도 기쁨은 억누를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의 주님이 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넷째주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깊이 묵상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들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겠다. 성육신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림절에는 교회도 그 절기에 맞게 장식하기도 한다. 대림절 화환을 만들기도 한다. 상록수 잎사귀로 화환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초를 네 자루 꽂는다. 매 주일마다 하나씩 초를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네 자루의 초만이 아니라 가운데 가장 큰 초를 하나 더 꽂아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탄절 당일에 밝히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스도는 의로운 태양이신데 초라는 것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기에 대림절에 작은 초를 켜는 것이 적절하다. 그 촛불은 이제 거대한 태양빛으로 바뀔 것이다. 대림절에 우리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말 4:2)을 비출 것을 기대한다. 교회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을 담당한 분이 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안재경 목사(남양주 온생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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