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하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전 미국 41대 대통령이 94세의 나이로 현지시간 11월 30일(금) 밤 10시경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는 자택에서 서거했다. 이날 그의 아들 닐 부시(Neil Bush)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 장관, 그리고 그의 손자인 피어스 부시(Pierre Bush)를 포함하여 그의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가족 대변인인 짐 맥그라쓰(Jim McGrath)는 부시가 그의 아내 바바라 부시(Barbara Bush)의 사망 8개월 후인 지난 금요일 오후 10시 직후에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의 슬하에는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전 대통령과 젭 부시(Jeb Bush) 전 플로리다 주지사를 포함한 다섯 명의 자녀가 생존해 있으며, 여섯 번째 아이는 어린 시절에 죽었다. 또한 17명의 손주들이 있다.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그의 아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마지막 말을 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부시의 마지막 시간에 대해 CNN에 전했다.

그들의 스피커폰 대화에서, 아들 부시는 아버지 부시에게 "훌륭한 아버지"(wonderful father)였다고 말했으며, 아버지 부시의 대답과 마지막 말은 "나도 사랑해"(I love you, too)였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전 대통령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17일 그의 아내 바바라 부시가 사망한 이후 여러 번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는 지난 몇 년간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가지 건강 문제가 있었다. CNN에 의하면, 마지막 몇 시간 동안 부시는 병원에 가고 싶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는 병원에 가고싶지 않고 73년 동안 그의 아내였던 바바라, 그리고 백혈병으로 사망한 그들의 고인이 된 딸 로빈과 함께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고 그의 측근이 전했다.

딸 로빈과 부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43대)은 그의 아버지를 "가장 고결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젭(Jeb), 닐(Neil), 마빈(Marvin), 도로(Doro), 그리고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놀라운 94년을 지내시고 돌아가셨음을 발표하게 되어 슬픕니다. George H.W. Bush는 가장 고결한 분이셨으며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최고의 아버지였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 가족은 '41'의 삶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아버지를 염려하며 기도해 준 분들, 그리고 친구들과 동포들의 사랑과 연민어린 애도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젭 부시는 토요일 아침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I already miss the greatest human being that I will ever know. Love you Dad!"

"저는 제가 이제까지 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분을 벌써 그리워 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부부와 다섯 자녀

G20 정상회의로 인해 아르헨티나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도 토요일 오전에 성명을 발표했다.

"멜라니아와 저는 지난밤 사망한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비통해 하는 국가와 함께 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그의 본질적인 진정성, 상대방을 누구러뜨리는 재치, 확고한 믿음, 가족과 국가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을 통해 동료 미국인 세대들에게 공공 서비스를 하도록 고무시켰습니다..."

백악관은 26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영부인이 함께 부시의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밝혔다. 사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폭스(FOX)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통령과 영부인은 어젯밤 늦게 조지 부시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월1일(토) 아침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과 영부인 그리고 온 나라가 애도를 표할 예정입니다. 국장은 모든 지지와 영예로 치뤄지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12월 5일(수)에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할 예정입니다. 대통령과 영부인은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대성당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입니다."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어린 시절에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다른 친구들에게 그가 갖고있는 것의 절반을 나누어주는 관대함 때문에 "절반으로 나누다(have half)"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퇴임 후 43대 대통령인 아들 조지 W.와 구별하기 위해 종종 "41" 또는 "아버지 부시"라고 불렸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1924년 6월 12일 매사추세츠 주 밀턴(Milton, Mass.)에서 주(州) 상원의원 출신 은행가인 프레스콧 부시(Prescott Bush)와 도로시 워커 부시(Dorothy Walker Bush)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커네티컷에서 공화당 상원 의원이 되었다. 아들 4명과 딸 1명을 슬하에 둔 부시 가족은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활발했다.

부시는 매사추세츠 주 앤도버(Andover, Mass.)에 있는 명문고교 필립스 아카데미(Phillips Academy)에 다니며 18세에 졸업하자마자 미 해군에 지원 입대했다. 그는 명문 예일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대학을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해군에 입대했는데, 그 이유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고교 졸업후 해군에 자원 입대한 부시는 18세로 가장 최연소의 항공모함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58회의 태평양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 그는 일본 남부에서 6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본 방공포에 맞아 격추되었으나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여 바다에 떨어져 가까스로 구출되었고, 공군 수훈 십자가 상과 3 개의 공군 수훈장을 수여 받았다.

1945년 1월 6일, 20세의 부시 대통령은 3년 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난 19세의 바바라 피어스(Barbara Pierce)와 결혼했다. 그들은 4 명의 아들, 조지, 젭, 닐과 마빈, 그리고 두 딸 로빈과 도로시를 낳았으나 로빈은 3세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결혼 사진

제 2 차 세계 대전 후, 그는 예일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때 첫 아들 조지 W.가 태어났다. 부시는 대학 야구팀의 주장이었으며 경제학 학위를 받으며 미국의 엘리트 클럽인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의 회원으로 있으면서 졸업했다.

"파이 베타 카파"(Ph i Beta Kappa Society)는 1776년 버지니아의 윌리엄 앤드 메리대학(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서 성적 상위 1%에 해당하는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미 최초의 명예클럽이다. "파이 베타 카파"는 외교 위원회(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 삼각 위원회(TC, The Trilater al Commission), 해골단(SBS; Skull and Bones Society) 등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부시는 부인 바바라 여사와 텍사스로 이주하여 석유사업을 했고 미국 하원에서 두 번 연임하였다. 1970년 상원 선거운동에서 패한 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유엔 대사(1971-73)로 발탁된 이후 일련의 고위 정치직인 유엔 주재 미국대사, 공화당 국가위원회 위원장, 베이징 주재 미국 연락 사무소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에 임명되었다.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실패한 그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레이건 대통령 재임 8년간 부통령으로 지냈다. 그후 1988년 부시는 대선에 출마하였으며 공화당은 인디애나 주 댄 퀘일(Dan Quayle) 상원 의원을 그의 대선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88년 민주당의 마이클 두카키스(Michael Dukakis)와의 대선에서 승리하여 1989년 1월 20일 미국의 4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식에서 "새로운 산들 바람이 불고 자유에 의해 생기를 되찾은 세계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 전체주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89년 12월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 년에 걸친 냉전의 종식과 동서간의 화합을 선언했다. 이후 사실 냉전 종식과 소련 제국의 분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동유럽 일대가 공산주의의 사슬을 끊어버리며 세계는 극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국제 문제에 직면했다. 1989년 그는 미군을 파나마로 보내어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를 퇴진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 불러들였고, 노리에가는 마약 밀매자로 재판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1990년 그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쿠웨이트 침공에 반대하는 30개국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켰으며, 1991년 초 이라크 군대를 철수시킨 100 시간짜리 육상 전투인 '사막 폭풍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때 "내 입술을 읽어라: 새로운 세금은 없다"라고 말한 부시 대통령은 국내 경제불만에 직면했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그는 세금인상 법안에 서명했고 저축과 대출의 부실도 해결해야 했다.

사법 분야에서 그는 두 명의 대법관, 즉 1990년 데이비드 사우터(David Souter), 1991년 클레런스 토마스(Clarence Thomas)를 임명했다.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그의 웅변 부족에 대한 비판이 커지기도 했지만 (예: '비전의 일'이라는 큰 그림에 초점을 맞추는 등) 부시 대통령의 견해는 친밀감있고 솔직했다.

대통령이 된 그는 특정한 야채를 싫어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브로콜리가 싫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제 어머니가 그것을 먹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의 대통령이고 브로콜리를 더 이상 먹지 않을 것입니다."

부시 전 대통령 가족 사진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에게 패배한 후, 부시 부부는 휴스턴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호텔방을 그의 법적 주소로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들은 또한 부시 가족이 오랫동안 메인(Maine) 주 물가에 있는 케네벙크포트(Kennebunkport)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행정부에서 아들 조지 W.를 대신하여 모습을 드러 냈고 2005년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와 아시아 쓰나미(Asian tsunami)로 황폐화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과거에 대선에서 그를 이긴 빌 클린턴과 힘을 합쳤다.

부시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정치 철학을 요약해서 "여러분이 서로 맞선다고 해서 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라며 "정치는 무례하고 불쾌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017년 가을에는 4명의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텍사스에서 허리케인 하비(Harvey), 이마(Irma) 및 마리아(Maria)의 희생자들을 위해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이것이 미국입니다. 미국은 ... 광활하고 평화로운 하늘에서 1천 점의 빛처럼 별같이 펼쳐지는 눈부신 다양성"이라고 국제 대회 수락 연설에서 말했으며 "1천 점의 빛"이라는 문구가 그의 행정부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This is America … a brilliant diversity spread like stars, like a thousand points of light in a broad and peaceful sky."

조지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는 텍사스 A & M 대학(Texas A & M University) 학생들은 부시 대통령의 서거 직후 미국 제 41 대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촛불 집회를 통해 빛의 포인트를 만들었다.

텍사스 A&M의 학생신문 배탈리온(the Battalion)에 따르면, 약 70명의 학생들이 조지 부시 대통령 도서관 밖에 있는 대통령 연못에 모여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불렀다. 철야 공동주최자인 티파니 이스터(Tiffany Easter)는 신문에서 "그가 공적으로 남긴 유산에 대해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영광이다"라고 밝혔다.

바바라 부시는 텍사스 A&M의 대통령 도서관에 묻혔다. 이 매장지는 1953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세 살 난 딸 로빈의 유골이 시냇가 근처에 있다고 휴스턴의 KTRK-TV가 보도했다. 나무와 꽃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곳에 제 41 대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딸 로빈과 함께 묻힐 것이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현지시각 12월 1일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자 우리나라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미셸 오바마 전 영부인은 성명을 통해 부시 대통령을 "애국자"와 "겸손한 종(humble servant)"으로 부르며 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축출하고 냉전 종식을 도왔다고 칭찬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신과 전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사망을 애도하며 그의 오랜 봉사와 사랑과 우정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고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전 대통령의 딸들도 부시의 삶과 공공 서비스에 경의를 표했다. "우리 아버지는 조지 H.W. 부시 대통령을 믿었습니다"라고 트리시아 닉슨 콕스(Tricia Nixon Cox)와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Julie Nixon Eisenhower)는 말했다. "조지 H.W. 부시는 외부와 세상을 위해 목적을 갖고 특별한 보람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시의 손자 조지 P. 부시(George P. Bush)는 그의 할아버지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트위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할아버지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인생은 미국의 세기를 휩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텍사스 석유 붐에 참여했습니다... 마지막 냉전 기간 동안 대통령직을 포함하여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뛰어난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부시 행정부(1989-1993)에서 국무장관과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 3세(James A. Baker III)는 "부시의 유산은 미국과 세계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며, "이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자기 자신이 없는 애국자의 섬김의 평생의 기록입니다"라고 말했다. 베이커는 또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최연소 미 해군 조종사였으며, 미국 텍사스 주 하원의원, 유엔 대사, 미국 최초의 중국 주재 미국대사, CIA 국장, 부통령 및 대통령이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전 국무장관은 부시가 "공무원의 전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미국을 사랑했고 그 누구건 전적으로 완전하게 섬겼다면서 "저는 그를 위해 일하고, 그에게서 배우고, 그의 동료 시민들에 대한 그의 깊고 지속적인 헌신을 경험할 기회를 가진 것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저와 소중한 친구의 멘토였습니다."

1991년 부시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된 클레런스 토마스(Clarence Thomas) 판사는 "버지니아와 저는 부시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게 되어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저는 그에 의해 콜롬비아 특별구와 미국 항소법원과 미국 대법원에 지명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부시와 부시 여사는 그 당시와 수년 동안 품위와 친절의 본질이었습니다. 버지니아와 저는 부시 가족 전체에게 우리의 생각과 기도를 전합니다. "

대법원장 저스티스 존 G. 로버츠 주니어(Justice John G. Roberts Jr.)는 부시 전 대통령을 "미국의 보기드문 애국자이며 근본적으로 품위있는 사람"이라며, 부시 대통령 가족에게 진심어린 애도의 말을 전했다.

한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유산이 사망하기 몇 시간 전에 전시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거의 30년 전에 처음 협상한 북미 자유 무역 협정의 차세대인 멕시코와 캐나다와 새로운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서 부시 대통령의 업적을 토대로 한 협정을 구성하지 않고 그것을 파기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나프타의 자연적 업데이트 보다는, 그것이 비참한 합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특징지었다. “끔찍한 NAFTA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그는 트위터에서 선언했다.

부시 대통령의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으로 진입했다는 것이 분명해진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다. 94세 부시 전 대통령의 죽음은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의 마지막 순간이 지나가고 분노와 불만 그리고 양극화의 정치로 뒤덮인 공적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의 결핍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리 해체하고 싶어도 부시 대통령이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 틀 내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부시 대통령이 북미 3대국을 단일 통합 무역 블록으로 짜맞추는 기본 개념을 받아들였다.

부시 대통령이 건설하고 강화한 동맹 관계는 허술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시민권, 환경 및 부시 시대의 법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세계 지도자들과 만난 트럼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에게 애도를 표한 직후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고, 그리울 겁니다. 그는 충실한 생활과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감탄의 말은 부시 가문과의 적개심의 역사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트럼프는 2016년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젭 부시(Jeb Bush)를 퇴출시켰고 정기적으로 조지 W. 부시를 비난했었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은 가을 선거에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고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했다. 젊은 조지 부시는 둘 중의 그 누구에게도 투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조지 W. 부시의 정책인 이락크 전쟁을 미국의 가장 큰 외교정책 실수 중 하나라고 언급하곤 했다.

12월 1일(토) 새벽 백악관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조종사 시절부터 8년 동안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 중국측 특사 겸 중앙정보국(Central of the Central) 국장에 이르기까지 공공부문에서의 성과를 축하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몬태나 주의 한 집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이 미국의 자원봉사 정신에 대해 설명했던 "천 가지 빛의 점"이라는 표현을 조롱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몬태나(Montana) 군중들에게 "여러분은 모든 수사학을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빛의 점’ 도대체 그게 뭡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한 가지를 압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라' 우리는 이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을 우선시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빛의 점' 나는 그런 빛을 결코 얻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걸 누가 알아냈습니까? 공화당이 내놓은 거에요”라고 말했다. 이 천 점의 빛은 일루미나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에 대해 비난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반목해왔던 존 매케인 전 아리조나 주 상원의원의 장례식에 불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영부인 바바라 부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시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참석할 예정이라고 백악관이 밝혔다. 존 매케인은 죽으면서까지 대통령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현재 부시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그의 측근들이 어떻게 나올지 미지수로 떠오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하여 30일 동안 조기를 달도록 지시하여 지난 토요일(12월1일) 워싱턴 주에 조기가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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