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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목사 칼럼】 敎會-사랑한다 나의 교회(5)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자녀들이 떠나는 교회

목사, 장로가 가는 천국이 싫어 교회를 외면한다면 믿을 것인가? 목회자 자녀가 교회를 등지고 장로 자녀가 장로 보기를 벌레 보듯 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삶과 사역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이 철들며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하나님이라면 조국교회는 이미 무너지는 벼랑에 매달린 꼴이다. 대형교회가 그들에게 제공한 것은 청춘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건전한 사귐의 시간과 정신적 방황과 갈등을 마음껏 풀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공헌한 바는 있지만 정작 무엇보다 중요한 영혼의 아픔을 매만지지 못했다. 영혼의 오열을 듣지 못했기에 필요한 음성을 들려주지 못했다. 예술적인 예배 진행과 정교한 메시지 전달은 완벽했지만 인간의 내면을 후벼 파는 말씀 특유의 파워, 그에 따른 영혼의 전율이 없었다.

편한 것은 한주 동안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교회에 와서 잠깐 엎드려 울먹이면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현대판 면죄부였다. 보통 사람들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지만 신자들은 악착같이 벌어 인색하게 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기업가 중에 신자가 많다. 자녀 앞에서 목사, 장로를 헐뜯고 교회를 안주거리삼아 폭언을 일삼았으니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질 부정적 이미지와 반감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는 남의 일이 아니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일은 더욱 아니다.

만성우울증에 걸린 교회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다. 설교자가 위로부터 받은 위로의 메시지가 없으니 신자들을 위로할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다. 메시지의 부족을 메우는 보조장치가 간증이다. 성경의 간증이 끝나고 자기 간증이 끝나고 은혜로운 누군가의 간증 인용이 끝나면 더 이상 채울 것이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자기간증의 변형인 자기 이야기다. 가족 이야기, 자식 자랑, 손주 자랑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정치와 시사평론이 끼어들고 음식에서 의복의 유행에서 철 지난 만담에 이르기까지 일회용 반창고처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사용한다.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펼치는 성공 목회담은 겸손을 깔아놓고 전해도 과시와 우쭐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형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 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신자들을 뺑뺑이 돌리듯 사정없이 돌린다. 정신 차리지 못하도록 혼을 쏘옥 빼놓는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거의 그물망이 잘 형성되어 있다. 목회의 신기술이 개발되면 서로 나눈다. 형제적 사랑이 아니라 철저한 기브앤드테이크의 정신에 근거해서다. 탁월한 부목들은 실제로 담임목사의 영적후견인 노릇을 하며 종처럼 부림당한다. 끝까지 충성하면 수년 후에 교회 하나를 떼어준다. 목회자의 영성이 고갈되고 신자들의 지병은 악화되고 교회도 만성우울증에 걸린다.

예수를 실종한 교회

오래 전에 오강남 교수의 <예수가 없다>가 나왔을 때 도발적인 책의 제목만큼 자성과 비난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오늘에 와서 그의 문제제기는 옳았음을 부인치 못한다. 오늘의 조국교회에는 예수의 이름은 있지만 예수가 없다. 주님이 실종되셨다. 예수의 실종을 신고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영원자존하신 그분께서 실종되실 리 없다는 반론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외치다 사신신학의 아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종신학의 아비라는 명칭도 붙이지 않는다. 그만큼 현대교회가 이전 시대에 비해 관용적이 된 것이 아니라 무관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주님의 현존이 확실한가? 그것은 사실인가? 아니면 단지 느낌인가? 주님의 임재를 확실히 느끼는가? 아니면 애써 그렇게 믿고 싶은가? 오늘 당신이 드리는 예배에 주님이 계신가? 계시다면 어디 계신가? 설교단에 계신가? 회중석에 계신가? 성가대원들 사이에 끼어 계신가? 문밖에서 어슬렁거리시는가? 주님의 편재를 얘기하면서 교회 전체에 편만하게 계시다 말하지 말라! 당신이 드리는 예배 형태가, 경건을 제거한 화려한 형식이 주님의 숨을 탁하게 만들어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해 교회당 밖으로 뛰쳐나가게 하지 않았는가?

성장 중지 선언하는 교회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조국교회가 건강을 되찾으려면 성장 중지를 선언해야 한다. 상한선을 정해놓고 넘으면 분립 개척을 시도해야 한다. 교회 내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것만이 성장신학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조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미국 워싱턴DC의 빈민가에 위치한 세비어교회(Church of the Saviour)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에 세워졌다. 전교인이 150명을 넘어본 적 없지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역이 200여개 되고 예산은 연간 2,000만불에 달한다. 양보다 질, 숫자보다 영혼의 위력을 보여주는 교회다.

예수가 예스다(Jesus is Yes!)인 교회

예수만이 해답이다. 예수가 없는 곳에 문제가 있다. 예수를 잊으면 문제가 중첩된다. 예수를 잃으면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기도에도 예수가 응답이다. 설교에도 예수가 내용이다. 선교에도 예수가 주체다. 교육에도 예수가 알맹이다. 사귐에도 예수가 생명이다. 섬김에도 예수가 모본이다. 개인의 심령에도 예수가 주인이고, 가정에도 예수가 호주며, 나라와 민족에도 예수가 왕이요 구심점이다. 예수가 믿음의 대상이요 예수가 소망의 실체며 예수가 사랑의 본질이다.

예수 없는 천국은 의미가 없고 예수 있는 지옥은 갈 만하다. 이성봉 목사님이 감격했듯이 여전히 예수는 나의 모든 것이다. 예수 생명 내 생명, 예수 죽음 내 죽음이다. 아침에는 예수로 눈뜨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든다. 커도 예수가 주님이고 작아도 예수가 주님이다. 자나 깨나 예수의 임재로 감사하고 먹으나 굶으나 예수로 만족한다. 사나 죽으나 나는 예수께 속했음이 은혜요 복이다. 동하고 정하는 모든 일에 예수만이 키를 잡고 계시다. 오직 예수! 다만 예수! 나 홀로 예수! 우리 모두 예수! 예스.

한 달 전부터 매일 암송하는 성경 말씀에 추가된 구절이 마음을 때린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None of us lives to himself alone and none of us dies to himself alone.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롬 14:7-8) 아, 정말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처럼 죽기까지 그러하고 싶다.

목자이신 예수님과 목자권을 포기한 교회

예수는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한 목자로 오셨다.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떼들을 돌보시기 위해 험한 산을 넘고 깊은 개울을 건너셨다. 하늘 보좌에서 지구를 찾아오기가 그리 쉽기만 했을까? 하나님이 인간되심은 천지가 개벽할 일을 훨씬 능가하는 대사건이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셨던 그분이 버려진 양떼들을 보살피기 위해 그 자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그분은 한편으로 양이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목자이셨다. 양과 목자의 이중적 이미지는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주님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주님은 양떼를 살피지 않고 자기를 돌보는 화의 목자들을 대신해 버려지고 늑탈당하는 양떼들을 위해 사셨다. 목자장은 양떼들의 목양을 위해 삯군이 된 목자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시다 희생당하셨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죽으심으로 영원한 목자장이 되셨다. 그분이 세상 곳곳에 양의 우리를 지으시고 자신이 구속하신 양떼들을 목자들에게 맡기셨다. 오늘의 교회는 위임받은 목자권을 포기하고 권리행사에 여념이 없다. 젯밥만 챙기려 든다. 그때 그분 곁에는 어부, 농부, 마부처럼 필부의 삶들이 녹아들었지만 지금 교회 곁에는 “사”자로 끝나는 강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교회(敎會) - 교회(交會) - 교회(橋會)

예수원을 설립해 조국교회에 영성 공동체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대천덕 신부는 조국교회의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한국교회는 가르침을 잘해 지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코이노니아의 부족으로 교회(敎會)란 명칭 대신 교회(交會)로 바꿀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사귐을 위해서는 서로의 삶의 영역을 드나들어야 할 터이니 교회(交會)말고도 교회(橋會)란 2차적 명칭까지 필요할는지 모른다. 과연 조국교회에는 성경공부와 연관된 다양한 배움의 프로그램들이 무수하다. 교제의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면 예배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요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과 사귐을 시도하는 교제로 볼 수 있다.

목회자와 신자의 관계도 물과 기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깝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어서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이상적인 관계라 주장하는 소리가 강하지만 옳지 않다. 그런 계산적인 사귐은 성령 안에서의 교제와 맞지 않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일치와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교회공동체로서는 부적합하다. 목회자와 신자가 인격적인 관계를 원만히 이룰 만큼이 교회의 적정 크기를 결정한다. 이에서 지나치면 욕심이며 이상발육은 교회의 건강을 해친다.

어깨에서 힘을 빼야하는 대형 교회

대형교회 주창자들은 베드로의 3천명과 솔로몬 행각에서의 5천명을 근거로 제시한다. 증거본문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집단회심의 결과였지 교회공동체로서 계속 유지된 모임이 아니었다. 교회의 모체인 예루살렘 교회를 필두로 하여 소아시아에 흩어진 모든 교회들은 가정교회가 주축을 이루었다.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공인이 있기 전까지의 약 3세기에 걸쳐 지상의 모든 교회는 작지만 강한 공동체였다. 교회에 공인된 힘이 주어지자 권력지향적인 세력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그들을 가르치고 보살필 성직계급이 필요하게 되었다.

세례증서는 출세가도에 필수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큰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교회의 대형화는 교회의 권력 쟁취와 궤를 같이 했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대형화와 함께 전 세계에 확산된 대형교회 운동은 교회가 세상에서 차지한 힘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교회가 스스로 힘을 줄이기 전에는 교회의 대형화 추세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대형교회도 필요하지만 웬만한 교회들이 지향하는 그런 추세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교회에 힘이 축적되고 능력이 쌓여갈수록 성육신의 의미를 되새겨 자신을 가볍게 하며 힘과 능력을 분산시킴이 옳다. 천사가 나는 것은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부흥을 모토로 내걸지만 부흥과 성장은 성격상 다르다. 모든 성경적 부흥은 심령적인 것이지만 성장은 그렇지 않다. 영적이지 않은 성장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흥은 몰락의 씨앗이요 바른 부흥에게는 가라지 같은 원흉이다. 교회 크기와 상관없이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고 목회자가 꿈꾸어야 하는 부흥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며 안과 밖 모두가 영적으로 건전해야 한다. 성경적 가치를 지키며 하나님이 세워주신 위치에서 주님의 신부다움을 잃지 않는 교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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