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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의 고난과 같더라도 소망을 잃지 않는 욥기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108) - 욥기(11)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부회장 KC대 전 총장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38:1-2).

욥기의 세계는 인간이 누구이며 인생의 무엇인지 말해준다. 욥기는 인생을 고난의 시각에서 보며, 또 고난의 세계를 밝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기는 신약 성경의 구주이신 예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지도와 같은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욥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며 신약을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욥기는 예수의 소명과 십자가, 예수의 고뇌, 예수의 내부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한다. 욥기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의인은 왜 고난을 당하는가? 의인이 왜 고난 속에도 경건한가? 욥은 이 신앙의 세계를 통해 믿음의 연단을 보여주며, 정금 같은 신앙을 얻는데 있어서 고난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욥은 고난과 절망, 죽음 앞에서 인간이 희망의 빛이 고난 속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빛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욥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보았다.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27:2-3).

비록 친구들이 욥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보지 않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으로만 볼 때에도 욥은 자신이 무죄함을 계속 주장한다(6:24,28; 9:21; 10: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욥16:1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욥은 심지어 앞으로, 자신의 인생 끝 날에도 자신은 순수할 것이라고 맹세하고 있다(27:4). 그는 과거나 현재에도 어떤 죄도 짓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맹세하며 대화를 끝맺는다(31장).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31:33-34). 비록 하나님이 욥 자신의 도움을 위해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그리할지라도 욥은 무죄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 자신의 항거로서 탄식하며 부르짖는다(욥30:20).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대답하시리라!”

욥기의 오래된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엘리후 연설를 삽입하여 새 이야기를 진행한다. 욥의 도전은 즉시 하나님의 대답이 뒤따르게 된다.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38:1).” 그 대답은 간접적으로만 욥의 몫이 된다. 그 질문은 이렇다. “내가 땅의 기초를 둘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하나님과 같이 팔이 있느냐?”(38:4;40:9) 이 질문을 통해 욥은 창조의 하나님 기적을 깨닫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과 같이 자신은 창조할 수도 없고, 그 창조 세계를 보전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임을 인식하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질적 차이가 나는 존재로서 감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견주어 볼 때 자신은 ‘새 발의 피’와 같은 존재로서 감히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을 안다. 창조질서를 운행하시는 분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자연 속에서 찾을 때, 그 무엇이 인간에게 가까운 것인가? 그 존재가 인간과는 멀리 떨어진 존재(별들, 날씨, 짐승, 우주)인가? 이 우주 세계를 유지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제한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은 아닌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인간이 올바르게 살았어도 하나님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과 하나님은 질적 차이가 나는 존재로서 하나님은 존재의 차원이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욥38:33,37-38).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모습은 바로 출애굽기 19-20장에서도 나타난다(시8편; 겔1:4).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수여할 때,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 속에서 임재하며 우레와 번개, 불 속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특이한 자연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다.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은 바알 종교에서 보이는 것과 다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욥기 서론과 결론부에서는 야웨와 엘로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론의 대화 부분에서는 신명을 ‘엘로아, 엘, 샤다이’로서 사용한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의 창조신학과 유사한 것으로서 욥기 1-2(1:7-12;2:2-6)장의 야웨 하나님이 결론 부(38:1-42:6)에서도 나타나서 야웨 이름(38:1;40:1,3,6;42:1)으로써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 함이니라”(욥42:7). 욥은 산전수전 다 겪고, 파란만장한 고난의 삶을 다 살고 나서 마지막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결과를 보인다.

이는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바위)처럼 우리의 일상이 부조리한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행복한 것이다. 욥의 결말을 가진다면 결국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이고 시지프산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야 하는 운명이다. 우리는 매일 그러한 일상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매일 되풀이되는 삶의 쳇바퀴 돌 듯 사는 삶, 희망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시지프스의 고뇌, 짊어진 바위같이 무거운 짐이다. 그러할지라도 욥과 같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하면 견딜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거운 바위를 나르는 일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힘겹게 희망의 바위를 지고 다시 시지프스 산을 오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신앙이 있다면 이제 고난이여 오라. 주가 계시니 두렵지 않다. 내가 하나님을 보고 있도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2-5).

 

 

박신배 박사  shbpae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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