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9는 “삼중일적 신”(Gottes Dreieinigkeit, 하나님의 삼위일체성-박순경, 김재진)이다. 우리는 Dreieinigkeit에는 ‘위(位)’라는 어휘를 부착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르트가 § 9.3에서 Dreieinigkeit에 대해서 제시한다. Triunity, 박순경은 “삼위일체성”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는 이 용어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바르트 자체가 이 용어를 반복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반복하는 것은 체계적이고 확실한 자기의식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바르트의 § 9는 § 9.1의 Die Einheit in der Dreiheit과 § 9.2의 Die Dreiheit in der Einheit이다. § 9.3 Dreieinigkeit이고, § 9.4는 Der Sinn der Trinitätslehre를 전개한다. 바르트는 § 9.4에서 결정적인 문장을 제시했다. 그것은 Die Trinitätslehre als solche ist nicht das Wort Gottes, das uns das sagen könnte(KD I/1., 404, GG 494, CD, 383) “The doctrine of Trinity as such is not the Word of God which might tell us”인데,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비판적인 숙고를 진행하며 더 좋은 가르침을 이루자는 제언을 했다.

그리고 § 10, § 11, § 12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을 개별적으로 비판적으로 숙고하면서 “삼중일적 신(Gottes Dreieinigkeit)”, 삼위일체론(Trinitätslehre)보다 더 좋은 가르침을 바르트가 확립한다. 우리는 개인 자격으로 제시한 신학(바르트의 신학)을 따를 것인지, 사도와 공교회가 결정한 가르침(기독교의 교리)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 9.1의 Die Einheit in der Dreiheit과 § 9.2의 Die Dreiheit in der Einheit에 대한 영역(英譯)에서 오역(誤譯)을 제시했다. 그것은 삼성(三性, Dreiheit)을 trinity로 번역한 것이다. 박순경은 ‘삼위성’이라고 번역했는데, 우리는 바르트의 개념에 ‘위(位)’를 부착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일성(有一性)’, ‘유삼성(有三性)’ 혹은 ‘삼중성’으로 번역하는 것을 제언한다.

바르트는 위의 두 문장이 삼위일체론(Trinitätslehre)의 중심 문제라고 규정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이라고 스스로 규정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사색적 산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사색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부당한 규정에서 출발하면서 삼중일성(Dreieinigkeit)이 두 개념을 총괄한다고 제언했다(KD I/1., 388, GG 477, CD, 368). 바르트는 루터가 제시한 Dreifaltigkeit(박순경 삼중성, 영역 Triunity) 어휘가 중간 개념처럼 제시했다. 루터도 삼위일체 교리에서 삼신론적 뉘앙스가 발생할 상황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루터가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을 바르트가 이룬 것이다. 루터는 Dreieinigkeit로 표현했고, 바르트는 Dreieinheit(삼유일성, unity)로 규정했다. Dreifaltigkeit, Dreieinheit, Dreieinigkeit는 독일어 사전 의미로는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바르트는 전통적 삼위일체(Trinity)가 뿌리적인 개념이라고 규정하면서(§ 8), 세 어휘를 섬세하게 개념화시키며 자기의식을 정립시키고 있다. 결국 최종 개념이 Dreieinigkeit(삼중일성)인데, 바르트가 개인 자격으로 규범화한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와 셋, 셋과 하나 관계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칼빈이 인용한(Inst., 1, 13, 7)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등장시킨다. 바르트의 강점 중 하나인, 고대 신학 자료들을 자기 목적(das diese Dialektik der Erkenntnis des dreieinigen Gottes, 박순경은 삼위일체로 번역, 영역은 triune God)에 맞게 이용하는 기술이다. 바르트 저술이 가진 가치이며 파악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그레고리우스의 유명한 문장을 소개했다. “나는 세 분에게서 조명되지 않고는 한분을 생각할 수 없으며, 한 분에로 되돌아가지 않고는 세 분을 구별할 수가 없다(박순경 역)”이다. 삼위일체(Trinity)의 정통 신학자의 매우 유명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신 이해(des dreieinigen Gottes)로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의 관심이 세 예배 대상이 아니라 한 예배 대상을 갖기 위한 믿음이었다는 것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바르트는 ‘세 인격’일 때 ‘세 예배 대상’을 가짐으로 이해한 것이다. 세 예배 대상을 가짐은 분명히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자기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박순경은 작은 글자에서 ‘dreieinigen Gottes(the triunity of God)’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면서, 큰 글자에서는 ‘하나님의 삼위성’으로 번역했다. 번역에서 바른 번역은 동일 어휘를 한 어휘로 대칭하여 번역하는 것이다. 영역(英譯)도 Triunity of God(Gottes Dreieinigkeit)과 tiunity of God(dreieinigen Gottes)을 구분하여 번역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 사람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영미계열이나 우리가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르트가 신 개념을 Trinity에서 Triunity of God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것을 바르트는 ‘한 예배 대상’을 위한 노작(勞作), 신학적 숙고로 주장하는 것이다. 박순경이 번역할 때 ‘일체성’(Eingkeik-英 unity)라고 번역한 것도 바르트에게는 ‘체(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번역이 아니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존재양식(Seinsweise)를 사용하며, 영원반복을 제시했다. 그리고 자기의 제시를 성경적 증언(dem biblischen Zeugnis)이라고 자기 독단적 주장을 미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계시는 한 신이 셋으로, 셋이 한 신으로 인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를 인식하면 나머지 둘이 인식되는 구조를 제언했다(KD I/1., 390, GG 478, CD, 370). 바르트는 한 신에 세 존재양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신적 인격의 페리코레시스(Perchorese)를 제언했다. 셋이 상호침투를 하면서 한 신을 이루는 것을 제시하는 것인데, 바르트는 자기 개념인 존재양식을 첨언시켰다. 세 존재양식이 상호침투, 상호교류를 통해서 한 신을 이루는 구조로 전환시켰다. 결국 unitas in trinitate, trinitats in unitate에서 바르트의 자기 개념인 Dreieinigkeit로 결론했다.

바르트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인용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의 신학문장을 자기 신학인 dreieinigen Gottes와 Dreieinigkeit로 가는 변증법적 이해를 위한 단계로 활용했다. 바르트가 한 예배 대상을 강조하기에 유일신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삼위일체(Trinity)를 소멸하는 결과를 산출했다.

별첨) 바르트에게서 삼위일체 논의가 부활, 활발하게 되었다는 논점은 매우 부당하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종결하고 삼중일신, 삼중일성 신(神) 개념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가 침체시킨 삼위이체를 부활시킨 정통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신 개념을 창출한 현대신학, 신정통주의자이다. 개혁신학은 정통주의 신학과 연속성을 가짐을 미덕으로 주장하지만,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와 불연속성을 미덕으로 자부한다. 그런 신정통주의에서 삼위일체 논의가 부활했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하지 않다. 바르트에게 와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믿음 교리 해체 논의가 더 활발해졌다”는 제시가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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