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아래 그림은 계몽주의 시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셉 라이트의 <공기펌프 안에 새에 대한 실험, 1768> 이라는 작품이다. 오른쪽 위에 달이 비치고 있다. 이는 정기적인 문화 소사이어티 모임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중앙에 아래에서 위쪽으로 실험을 위한 유리로 만든 공기펌프가 길게 뻗어 있다. 실험기구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실험을 하는 사람은 과학 교사로 보인다. 그는 공기펌프에 공기를 빼내어 진공상태를 만들고 있다.

진공상태 속에서 아래쪽에 있는 죽어가는 새 한 마리가 있다. 실험하는 교사는 새에게 공기를 다시 주입할 것인지를 묻는 듯 한 표정을 하고 있다. 공기를 주입해서 새가 살아나면 실험은 성공하게 된다.

조셉 라이트 <공기펌프 안에 새에 대한 실험, 1768>

성공을 장담하는 교사는 시선을 던지고 있다. 구경꾼 중에 어른들은 마치 신비로운 무엇인가에 홀린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래쪽에 있는 남자는 한 손에 회중시계를 들고 새가 몇 분 동안 살아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다. 새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과학 기술이 주는 경이로운 힘에 감탄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오른쪽에 있는 아이들은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 아버지로 보이는 한 어른이 딸들을 달래고 있다. 한 아이는 죽어가는 새의 끔찍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 중앙에 과학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지하고 겁이 많은 아이들에게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굳이 아이들을 화면에 등장시킨 것은 계몽적인 과학교육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 빛을 통해 구질서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자들의 목표이다. 아이들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는 모습을 나타내고자 했다. 실험 관찰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 인간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신념을 후대에 심어주려 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 대표적인 그림, Age of Enlightenment: Accomplishments and criticisms 계몽주의 시대, 업적과 비판

인류에게 있어서 지난 2~3세기는 과학 기술의 시대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학문이나 산업의 영역에서 출발해서 점차 인간의 일상생활 전반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확대되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과학 기술이나 기계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물건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를 반기는 것은 전등, 밤사이에 혹시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은 없는지 핸드폰을 살핀다. 거실로 나가면 가전제품의 천국이 기다린다. TV, 오디오, 냉장고, 디지털 벽시계, 빨래는 버튼만 몇 가지 조작하면 세탁기가 알아서 세제 양 과부를. 물에 양을 조절하고 탈수까지 끝내준다. 집을 나서서 버스나 전철을 탈 때는 정보가 전자식으로 처리된 교통카드를 사용한다. 어디를 가나 항상 온라인 상태로 대기 중인 컴퓨터가 대기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등공신을 찾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성의 발전'이다. 근대 서양에서 꽃 피우기 시작한 이성적 사고방식이야말로 인간을 과학 기술 기계 문명으로 인도한 안내자였다. 일체의 미신적•마법적인 사고를 추방하고 오직 수학적•과학적•엄밀성에 기초한 사고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선언한 근대 이성은 인간 정신의 승리 선언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사회적으로 산업혁명을 나왔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과 기계 문명의 예루살렘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를 외치며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지배를 강조한 베이컨은 과학 기술 혁명에 선지자였다. 서양의 근데 사상들은 경험론이든 합리론이든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인간을 자연에 대한 지배자의 의지로 끌어올리는 이원론적 자연지배 사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영국에 불어 닥친 기계 문명의 광풍은 다양한 영역에서 맹신도와 지지자를 만들어냈다. 예술영역 또 예외가 아니어서 미술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몰두하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조셉 라이트가 이 그림을 그린 후 200년을 넘는 동안 인류의 모습은 과학 기술의 경이로운 눈빛을 보낸 그림 속 어른들의 모습이었다. 이제 이성과 과학은 과학이 절대적인 존재였던 신을 대체해 가고 하나의 신앙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새에게 산소를 주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잔혹한 생체실험을 한 일본의 731부대 마루타 부대를 생각나게 한다. 조셉 라이트가 살던 시대에도 이미 그런 징조는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그림 중에는 앞에서 언급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경이로움을 넘어서서 거의 과학에 대한 경배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 절대적 진리라고 여긴다. 또한, 과학 기술로 인간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중세의 연금술사보다 현대인들이 더 지독하게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도가 되어 그 앞에 공손하게 무릎 꿇고 경배를 드리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개념이 되어버린 "생명공학"이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연금술사들은 인간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명조차도 공학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이를 과학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또 한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의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해서 인간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모든 일이 과학 기술이라는 면허증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성의 총아인 과학 기술은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배격하고, 과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것만을 가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죽어가는 새를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과학 기술 만능주의가 만들어 낸 온갖 재앙들을 두려움의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환경파괴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 낸 생태계 교란, 핵의 위험,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 등이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현실에 위협이나 재앙이 되는 상황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갖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까? 차가운 얼음이성으로 아이들의 감성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그림 속에 어른들이 아이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배워야 한다.

17세기 과학혁명 이래로 인류가 과학에 대해 품어온 환상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과학은 세계와 우주에 드리운 무지의 어둠을 덜어 내줄 것이며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것이며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끌어낼 것이라는. 물론 이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그러나 21세기 최첨단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은 또 한 번 대책 없는 희망을 붙들고 있지 않은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문명이 만들어낸 재앙 미세먼지는 숨 쉴 자유를 빼앗았다. 한국의 원자로 하나에 1985년 러시아의 체르노빌에 있었던 큰 재앙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미 일본에는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지진으로 인해, 치유 불가능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있지 않았는가? 어떤 사고나 아니면 몇 사람들의 악의적인 의도로 핵이나 세균폭탄이 사용되는 제3차 전쟁이 터질 수 있다. 환경호르몬으로 먹을 수 있는 식물, 곡물, 동물이 없어질 경우, 오늘날 문명사적 상상하지 못했던 인류의 재앙에 대해서 인류는 과연 책임질 수 있는가? 과학에 대해서 품어온 기대만큼이나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부터 도적같이 예고 없는 재앙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다. 이성은 집단(集團) 이기(利己) 앞에 광기(狂氣)가 된다. 과학자들에게 맡겨진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미래는 시험관에 있는 비둘기만큼이나 위태롭다.

이처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발한 과학 기술 때문에 문제 해결은커녕, 더 큰 문제에 봉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과학의 이데올로기화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자기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선이요, 정의요, 사랑이라는 규정 때문에 처음부터 종교적 특성을 가진다. 부지중(不知中)에 기술에 대한 경외, 내지 숭배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다. 이처럼 이성에 기반을 둔 과학 기술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이 시대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우상숭배행위이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재난이 될 수 있다.

이성에 기초한 과학 기술은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주객이 전도되었다. 모든 우상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주인인 인간에게 편익과 안전을 약속해 주는 듯했지만, 인간의 과도한 기대에 힘입어 생명력을 부여받으면서부터 인간을 협박하고 속박하기 시작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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