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18절은 기록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했다. 이 본문과 관련하여 장키우스(Hieronymus Zanchius, 1516-1590)는 그의 책 ‘영적 결혼’(the spiritual marriage)에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이 아담을 홀로 있게 하지 않으신 원인은, 그것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그것은 아담 자신을 위해, 혹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도움이 없이 창조하시고 만드실 수도 있었을 모든 후손들을 위해 선하지도 않으며, 유익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남자와 여자의 도움이 없이 후손들을 창조하시고 만드실 경우) 그들(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슨 상호간의 사랑과 선한 뜻이 있겠는가?”라고 언급하면서, “그 결과 선한 이유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항상 복종하고 모든 정당한 의무와 순종을 수행할 준비가 된 조력자(여자)를 만들어 주셨다.”고 했는데, 이러한 바탕 가운데서 장키우스는 결혼제도와 관련한 영적인 의미들을 해설한다. 이에 따라 장키우스는 “아내는 남편을 지배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머리로부터 취하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아울러 “그녀는 발아래 밟히지 않아야 하므로, 발로부터 취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라고 했는데, 오히려 “마음으로 사랑받아야만 하므로, 그녀는 심장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갈비뼈로부터 취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구약성경 창세기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장키우스가 언급한 바와 다르지 않다. 사도 바울이 고전 11:8-9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다. 물론 11절에서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지만, 기본적인 질서에 있어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 11:3)인 것이다. 이러한 영적 질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 사회에 있는 자연스러운 질서요 체계인데, 여권 운동은 다만 “그녀는 발아래 밟히지 않아야 하므로, 발로부터 취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사랑받아야만 하므로, 그녀는 심장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갈비뼈로부터 취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부각시키는 정도에 한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여권(women's rights)에 있어 자꾸만 “남편(남자)을 지배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더 이상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는 엡 6:1절 말씀을 따라 그 부모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에 부모가 따라주기를 더욱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한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엡 6:5절 말씀의 교훈(명령)하는 바에도 불과하고,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거스르고 저항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우리 사회의 추세다. 그뿐인가?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롬 13:1절의 권면(명령) 또한 기본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그리하여 특정 성향의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집권하면, 입법·사법·행정 모든 부문에 걸쳐서 그 권세가 쉽게 부정되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나 입법부인 국회에서의 그러한 양상은 거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으니, 특정한 정치성향을 배경으로 하는 정부정책에 대해서는 아예 안건상정 자체를 부정하고 가로막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이 바로 국회가 되어버렸다. 또한 사법부인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권위(권세) 또한 공공연히 부정되고 있는 것이 작금 우리사회의 모습이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사법부의 권위에 공공연히 저항하는 종교집단이 바로 기독교(특히 개신교)인 모양새이니, 대법원의 강남구 서초동에 있는 한 장로교단의 초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위임결의 무효 판결과 관련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무너뜨린 처사라고 하는 반대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고, 낙태죄 위헌 판결과 관련해서도 헌법재판소를 향한 기독교에서의 규탄과 성명이 줄을 잊고 있다.

그런데 사회개혁의 세력과 확고히 구별되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계승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장로교회의 체계에서는 공통적으로 제5계명과 관련하여 “위에 있는 권세”가 곧 “부모”이기도 하다고 해석하며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104문은 “다섯째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고, 답하기를 “내가 부모님과 모든 윗사람을 존경하고 사랑과 진실로 대하며 그들의 모든 선한 교훈과 징계를 으레 순종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약점과 실수에 대하여는 인내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도록 작성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 1578-1646)의 ‘기독교 교리에 대한 간략한 교리문답’에서도 “두 번째 돌 판의 첫 계명”에 관하여 “사회에서 그의 지위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의무”가 바로 이 계명에서 명령되는 의무라고 답하고 있다. 즉 위에 있는 부모, 주인, 군주와 공직자들에게 자녀, 종, 백성들은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장대선 목사, 고백과문답 출판사 대표

한편, 윌리엄 트위스의 간략한 교리문답에서는 “백성들은 모든 일들에 있어 그들(군주와 공직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뒤에, 곧장 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답하도록 되어 있고, “그렇다면 어떤 것에 순종합니까?”하고 다시 물은 뒤에, “중립적인(정색) 것들에 순종합니다.”라고 답하도록 하고 있다. 거기서 “중립적인 것들”이란 “하나님이 명하지 않으셨고, 금하지도 않으신 그러한 것들”, 예컨대 아디아포라(Adiaphora)에 해당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계들의 법칙”(the rule of relatives)에 의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타인(위에 있거나 아래 있거나, 혹은 동등한 자들 상호간)을 위하도록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명하지 않으셨고, 금하지도 않으신” 다양한 현실의 문제들에 있어서 그 해석과 적용의 원리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맡기는 “관계들의 법칙”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04문답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부모님과 모든 윗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라고 한 맥락과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신자들의 모든 사고와 가치의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며, 또한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현실의 여러 다양한 사항들에 대해서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적인 질서에 기준을 두도록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불복종의 시대 가운데 있는 다수의 신자들과 교회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간과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질서 또한 간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회의 질서를 수립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기를 먼저 힘쓰기보다는 오히려 거스르며 불복종하는 경우를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윌리엄 트위스의 교리문답이 짚어주는 바와 같이, 제5계명이 “중립적인(정색) 것”들과 “관계들의 법칙”(the rule of relatives)에 의해 광범위하게 하나님의 섭리(질서)를 지향하도록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제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즉 불복종에 앞서, 우리들은 “중립적인(정색) 것”들에 대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위에 있는 권세를 따라 순종하도록 요구하신 “관계들의 법칙”(the rule of relatives)으로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는지, 혹 이를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상고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앉는가?

백화점이나 기타 서비스 업종의 기업에서는 종종 ‘암행감찰’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사의 직원들이 가장 소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나 대상으로 가장한 감찰관에 의해 직원들이 평가를 받는다. 즉 노인이나 어린이 혹은 누가 보더라도 직원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소득수준이 되지 않을 법한 고객으로 위장하여, 그에 대한 직원들의 서비스가 어떤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개척하여 지극히 적은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하거나, 심지어 가족들만으로 예배를 드리며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 수고하는 소위 개척교회 목사로서 지내다 보면, 은연중에 기업체의 감찰관처럼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수준을 체크할 수 있게 되곤 한다. 어느 정도로 규모가 갖춰진 지교회에서는 도무지 드러내지 못했을 태도와 자세를, 개척교회와 목사 앞에서 은연중에 보여주는 경우를 자주 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가운데서 개척교회 목사들은 스스로의 목회자세가 어떠한지 그 진면목을 스스로 체크하게 되기도 한다. 즉 지극히 적은 수의 회중이나 낮은 신앙수준의 회중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목회태도와 자세가 어떠한지를, 조금만 자성의 자세를 견지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 28:19-20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혹은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목사는 회중의 규모가 어떠한가에 상관이 없이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 준행함으로써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지상에 있는 가시적인 교회에 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회중인 신자들도 마 28:19-20절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어, 세례를 받고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며 지키도록 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양떼(flock)로서 지상에 있는 가시적인 교회에 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장로교회의 교회론에서는 항상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말하는데, 그 세 표지들은 언뜻 교회의 직원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치리회의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그리고 이를 실행하며 집행하는 집사들에 의해서만 그 세 가지 표지가 지상에서 구현되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나머지 반쪽을 전혀 바라보지 못한 이해일 뿐이다. 교회의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직원들은 교회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지만, 그러한 직원들만으로는 교회가 아직 다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회중 가운데서도 교회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야만 비로소 그 ‘회’(synagogue)가 교회임을 드러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청지기요 일꾼 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서 잘 선포된다 할지라도 듣는 회중이 그에 관심이 없거나 그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면,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표지는 결국 흐릿하게 되고 만다.

또한 성경에 명시하거나 출원될 수 있는 근거에 따라 성례가 정확히 시행된다고 해도 그러한 성례에 대해 회중이 무지하거나 실감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성례는 보이는 말씀으로서도 은혜의 방편으로서도 여전히 미흡한 반쪽 정도의 표지로 드러날 뿐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치리회와 그 직원들이 아무리 말씀을 따르도록 엄밀한 치리를 시행한다고 해도, 회중들이 그러한 치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치리는 허공을 치는 헛것이 되고 만다.

이렇듯, 교회에서 회중인 성도들이 말씀을 잘 듣고 분별하며, 성례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참여하여 영적인 은혜를 얻고, 아울러 말씀에 따라 치리하는 교회(치리회)의 치리를 잘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나머지 반 토막에 해당하는 아주 중요한 의무(duty)의 영역이다.

만일에 이를 등한히 하고서 회중들이 모두 교회의 직원으로서의 역할만을 행하려 한다면,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교인들이 단상에 올라가서 회중석은 텅 빈 예배당의 모습과도 같을 것이다. 그처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모습밖에는 드러내지 못하는 회중을 교회라고 부를 수 없고, 그로인해 교회는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개혁신학에 귀를 기울이는 많은 페친들 가운데에도 이러한 개혁된 신앙의 기초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저기서 취한 개혁신학의 정보들을 숙지하고 전파하는 데에는 관심이 있어도, 그러한 신학을 따라 지교회에서 개혁된 신자로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이다. 

그로 말미암는 현상이 바로 논쟁인데, 심지어 목회 사역이나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담당하는 자가 아니라 지교회의 장로(치리장로)요 집사, 혹은 회중의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신학적인 논쟁을 일삼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목격하곤 한다.

물론 그런 태도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교회와 공교회적인 교제의 자리에서 자기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교회의 표지와 관련해서, 이 지상에서 가시적인 교회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의 표지와 관련해서, 나 자신이 어떻게 그 표지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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