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산교회 장대선 목사

현대의 사상과 문화를 흐르는 일관된 맥락은 ‘개인주의’의 성격으로 대표될 수 있다고 볼 것이지만, 묘하게도 그러한 개인주의는 또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형태를 통해 개인을 뛰어넘는 시너지(synergy)를 창출시키고 있다.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개인’이라는 개념과 전제가 뚜렷한 현대사회에서, S․N․S를 통한 개인들 간의 독특한 교류방식은 개인을 뛰어넘는 독특하고도 탁월한 지성을 창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성의 급격한 성장과 성숙은 이미 거의 이루어진 상태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는 말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사유하는 거의 모든 개념들과 아이디어는 이미 고대에서부터 그 원형이 제시되어 있었던 것으로 다만 그 심도와 부피가 더욱 세밀하게 되고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도와 부피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발달하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처럼 심도 있고 거대하게 된 집단지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에 있어서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혹은 그 어느 시대 못지않게 협소하고 미약한 상태다. 얼핏 중세시대의 어두움에서 계몽된 현대인의 상태가 월등할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정작 인격과 심성의 정밀도와 크기는 요정들이 창궐하던 시대만도 못한 것처럼도 인식된다.

그래서일까? 현대의 기독교 내에서 신자들의 신앙과 그 인격에 있어서의 성숙은, 개혁해야만 할 것들을 개혁하고 일소하려 애쓰던 시대의 신자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은 기독교 내의 지교회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온전하게 보이는 지교회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 지경이고,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목사와 회중들 사이의 잡음과 분쟁이 끊이지를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의 개인주의 시대풍조는 고스란히 신자 개개인의 신앙성숙, 곧 ‘성화’와 관련한 중요한 변화를 양산했다. 인격과 기도와 성경읽기, 심지어는 설교와 교리교육과 같은 것들조차도 유투브(Youtube)나 S․N․S,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붐을 이루고 있는 각종 교리서적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변모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은 각종 매체들의 발달과 함께 목회를 담당하는 교회의 직원들, 특히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갖는 무지와 세속화가 주요하다. 더구나 능력이 있다고 하는 목회자들은 대형화된 지교회에서 사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형화된 지교회의 경우에는 회원수가 기본적으로 천명 단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사실상 인격적인 목회적 돌봄과 양육이 불가능 한 실정이다. 바로 그러한 구조적 모순 가운데서 성도들의 신앙성숙은 전적으로 개인의 경건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신앙성숙, 곧 ‘성화’(sanctification)란 기본적으로 감정의 치유와 인격의 도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화의 기본적인 개념은 이 지상에서의 “생활 가운데 죄악적인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루이스 벌콥 조직신학의 성화론) 것이다. 따라서 성화의 전제는 가장 우선적으로 성화의 창시자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에 있다.

또한 ‘거룩’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주로 복수로써 호칭하는 가운데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레 11:4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시어서, 거룩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과 아울러 “거룩할지어다”라고 하는 명령(혹은 선포)을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하여 하시고 있다. 마찬가지로 겔 36: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 17:16절에서 주님은 이르시기를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곧장 17절에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거룩케 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그러한 거룩은 한 개인에게가 아니라 집단 전체에게 의도되며 또한 요구되고 있는 것이 성경의 개념인 것이다.

무엇보다 성화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어 ‘qadash’와 헬라어 ‘hagiazo’는 공히 분리의 관념을 강조하는 말인데, 벌콥은 그의 조직신학에서 “그 성경의 용어들은 마음 속에 일으켜진 영적 특질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위치와 관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성화된 인간은 원리상 생활 가운데 죄악적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성화라는 것은 우리들에게서 시작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니, 요 17:19절의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한 말씀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성화의 도구는 일차적으로 “진리”다. 그러므로 20절의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이다.”라고 한 말씀에서 이른 “그들의 말”이란, 그들 자신의 말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일컫는다.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고 이르신 것이다.

이러한 성화의 개념(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랑스 신앙고백(1559)인데, 프랑스 신앙고백은 ‘성화’라는 주제를 별도로 분리해서 다루지 않고 교회에 대한 고백들 가운데에 내포하여 다루고 있다. 특별히 교회에 관한 고백을 시작하는 제25조에서 “교회에 필요한 목사”라는 제목으로 “이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동참했으므로, 그리스도의 권위로 세워진 교회의 질서는 신성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아울러 “그러므로 목사 없이 교회는 존속할 수 없다. 목사의 직임은 무리를 지도하는 것으로, 정식으로 청빙되어서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우리는 마땅히 그를 명예롭게 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처럼 고백하는 이유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편이나 하위 수단에 매이지 않으시지만, 다만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좋게 여기신다.”고 했고, 아울러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거짓말로 말씀 설교와 성례전 시행을 완전히 폐지하고자 하는 모든 환상가를 혐오한다.”고 했다.

결국 성화는 교회로 모인 가운데서, 특별히 그 가운데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사들을 수단으로 하여 이뤄진다는 것이 성경과 성경에 충실한 신앙고백의 맥락이다. 신자 개개인의 성화는 교회와 긴밀하게 연계되며, 그러한 교회는 또한 교회의 직원인 목사와 긴밀히 연계되고, 목사는 또한 노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장로교회들의 성화에 관한 이해는,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직원들과 관계된 노회의 건전함에까지 연계되는 집단(공동체)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한다. 이스라엘(구약의 교회)과 신약교회는 바로 그 같은 사실을 교훈하고 있으니, 신자 개인의 성화는 혼자로 묵묵히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하여 이뤄지는 것이고, 아울러 그러한 교회의 거룩함은 목사와 장로들로 이뤄진 치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노회와도 더욱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신앙성숙이 전적으로 개인의 경건에 맡겨져 있는 현대 기독교의 풍토는, 바로 이 같은 성화에 대한 이해들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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