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30일 황상하의 신학덕담

빛에 대한 과학의 설명은‘눈의 망막을 자극하여 시각을 생기게 하는 전자기파로 빛 또는 가시광’입니다. 처음 빛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한 사람은 고대 헬라의 철학자인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와 유클리드(Euclid)이고 빛의 과학적 성격이 알려진 것은 17세기 무렵입니다. 영국의 뉴턴은 빛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입자라고 했고, 같은 시대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는 빛의 반사와 굴절을 확인하고 빛은 파동(波動)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파동은 반사와 굴절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나 빛의 직진성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19세기에 들어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자파와 빛의 속도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전자파도 일종의 빛이라는 것을 증명한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20세기 초가 되면 양자 역학에 의해 빛은 전자파의 일종으로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 성질을 가진다는 것과 또한 빛이 직진한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그 후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로 오늘날 빛은 직진성과 파동, 반사, 굴절, 회절, 산란, 분산, 스펙트럼, 색깔 등 아주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이 알려졌고 정밀한 빛의 속도도 측정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도 빛의 본질은 여전히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 중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는 창세기 기사에 나오는 첫날에 대한 묘사입니다. 빛과 어둠,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식 가능하도록 하고 유의미하게 하는 것이고 심오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 빛은 물리적인 빛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개념화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모든 생명이 형식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성경은 빛에 대하여 물리적으로 다 규명할 수 없는 차원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보다 빛을 먼저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빛이 단순히 물리적 대상 이상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게 합니다. 빛은 신학적 차원이 아닌 물리적 차원도 신비의 깊이를 인간이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빛은 모든 생명과 존재가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이지만 영적인 빛은 생명이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빛(אור, o~r)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에 대하여 가치 평가를 하시고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은 역사 이래 빛을 통해 모든 물질적 존재와 과학과 도덕과 미의 의미를 발견하고 개념화 할 수 있어서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 차원에서는 태양을 빛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빛이 먼저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양보다 빛이 먼저 존재했다는 것은 그 어떤 고대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오직 성경을 통해 히브리인들만이 알게 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태양보다 선재한 빛의 존재를 이야기 하는 것을 단지 히브리 민족의 관습적 해석이라는 이들이 있지만 히브리 민족이나 그들의 관습이라는 것도 창조 계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태양이 없는 빛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플라톤은 태양을 “최고의 선”이라고 하였고 필로는 창조주를 “빛의 원형”이라고 하였지만 그들 역시 태양이 없는 빛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빛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한계가 있지만 빛의 물리적 본질에 있어서는 태양빛과 태양보다 선재한 빛이 서로 다르다기보다는 같은 빛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빛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오르는 남성 단수 명사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우리와 달리 물도 물들(מַיִם, maim)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태양을 비롯하여 빛을 발하는 여러 천체들을 생각할 때 빛을 복수형으로 표현했을 법한데 첫 창조에서의 빛을 단수로 표현한 것을 볼 때 이는 물리적 빛이 아닌 인간이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빛의 절대성과 그 차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창조된 빛이 어떤 빛이든 간에 과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 실체와 의미를 규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칼빈이 이 빛에 대한 주석에서 구체적 언급을 조심한 것도 그런 차원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경외심과 겸손의 태도를 견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 이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첫째 날 저녁을 맞이하기 전에 빛과 어두움, 이를테면 밤과 낮은 이미 지구 표면에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지구 한 쪽이 낮이면 반대편은 밤인데 인간은 지구 표면의 빛과 어둠의 구분선을 16세기(1542년 경)에 이르러서야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인지(認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우주비행사들은 이것을 친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고대 철학자들은 빛의 인식론적 또는 존재론적 신비를 탐구하였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슬람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베이컨, 칸트 같은 이들이 빛에 대한 관심을 보였던 이들입니다. 어거스틴도 마니교도였을 때 빛에 대한 그러한 탐구에 관심을 보였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니교(Manichaeism)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이 대결하고 갈등하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이 회심 후에 마니교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탈출하여 바른 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와 태양이 있기 전 빛과 어둠, 즉 밤과 낮이 창조되었다는 창조 기사에 주목하였습니다. 지구 자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빛이 어떤 작용에 의해 아침과 저녁을 만들어 내는지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날에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상식적 과학을 어거스틴 같은 천재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서 몰랐던 것입니다. 곧 이어 그의 관심은 물리적 빛을 넘어 그 빛이 성경에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 것에 주목하게 되어 “신의 도성”을 쓰게 됩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빛과 어둠의 갈등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갈등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빛과 어둠의 갈등입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의 끊임없는 갈등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어거스틴이 빛을 천사라고 해석한 것은 알레고리 해석이지만 루터는 그 해석을 수용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의 빛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이 빛의 물리적 성격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빛과 어둠의 갈등은, 빛은 말씀이고 어둠은 인간의 상황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신앙과 이성의 갈등 역시 빛과 어둠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은 갈등이 있을 수 없고,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 부족애서 발생한 오류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의 갈등이 인간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오류하고 하더라도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루터는 빛의 물리적 성격에 주목하기보다 십자가로 나타나는 미래의 영원한 빛, 즉 달빛이 햇빛 같아질 때가 올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칼빈은 빛과 어둠에 대한 구체적이고 과학적 설명은 미결의 문제로 남겨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시고 또한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인 빛은 이성이나 지성 같은 인간성의 한 국면이 아니고 빛과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편 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빛과 생명으로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그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빛과 대치하여 어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갈등은 물리 세계이든 영적 세계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빛과 어둠의 대치 상태는 복음서의 주요 사상입니다. 요한은 빛이 비치고 있다고 하여 과거에 한 번 비친 것이 아니고 빛이 계속하여 비치는 빛의 행위를 이야기 합니다. 그 빛은 한 번도 그 행위를 중단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빛의 행위를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둠이라 함은 어둠 형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일반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인간은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황상하 목사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에는 “이긴다”는 희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고 있으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고 그것은 창조 사건에서 이미 천명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또 다시 확인 된 것입니다. 빛과 어둠의 갈등은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갈등을 빚었고 빛은 어둠을 이겼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의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빛과 어둠의 갈등에서 빛의 최종적 승리를 기다리며 염원했지만 요한처럼 이미 승리했노라고 단언하고 외칠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이 참 빛을 말할 때 그는 빛을 추상 개념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는 근거는 장차 도래할 종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빛의 창조와 십자가 사건에서 선언되고 실현되고 확인 된 때문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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