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늘의 국경 초소

교회는 본질상 인간적 조직(organization)이 아니라 영적 유기체다(organism). 영적이기에 출발 또한 땅이 아닌 하늘에 있다. 지역 교회마다 이름이 있지만 원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거나 주님의 교회다. 교회는 어느 지역이나 교단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혹은 주님께 속해 있다. 교회의 천상적 기원은 교회가 하늘에서 땅으로 찾아오신 주님처럼 성육신적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늘의 국경 초소다. 조직은 딱딱하게 굳어도 유기체는 살아있다. 교회는 생동적이고 활력이 넘친다. 교회에 충일한 동력은 성령에게서 비롯된다. 성령은 모든 영적 에너지의 근원이다.

완전하고 무오한 교회의 원형

우주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세상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있다. 크기로 보아서는 지구가 우주의 한 작은 변방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곳으로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다. 광막한 우주 한 가운데서 지구는 한 티끌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찾아오실 정도의 무한한 가치를 지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함은 구속사적 측면에서 타당하다.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인간 영혼이 지구에 산재해있음이 이 작은 행성의 중요성을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주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시작된 구원의 여정에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점 삼는다. 지상 교회가 보여준 불완전함과 오류는 교회의 원상이 아니다. 주님이 교회의 원형이다.

교회의 원형은 완전하고 오류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렇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하며 무오하시다. 머리가 완전무흠인데 교회가 불완전유흠이라면 한 몸이라 일컬을 수 없다. 머리 따로 몸 따로 일터이니 말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정결케 하신다. 역사적 교회가 보인 죄악상이 참혹하기 그지없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신다. 자신이 피를 흘려 값 주시고 사신 보화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성도들의 모임인 신앙공동체다.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지 않은 교회는 진정한 교회라 이름 할 수 없다.

성직자는 목자인가? 목동인가?

교회의 힘은 세상의 권력과 질적으로 다르다. 교회의 힘은 본래적인 거룩함에서 출발한 내적인 청결, 섬김, 일치와 연합, 하나님의 주권을 긍정함에서 나온다. 이 보편적인 성향은 천상 교회의 표징이다. 교회의 권세와 능력은 주님께 속했기에 성직자나 일반 교인 할 것 없이 모두 이 영적 권위에 복종한다. 직분을 앞세워 이 영적 권위를 도용하려는 행위는 망령되고 사악한 짓이다. 성직자와 교인 모두 주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아무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가 왕이시면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주님이 목자시면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다.

성직자(목자), 신자(양)의 구별은 비성경적이다. 우리에게는 목자장 되신 한 목자가 있을 뿐이다. 굳이 성직자를 양과 구분하려면 목자보다 목동으로 표현함이 옳다. 목자의 뜻을 따라 그분의 양떼를 돌보는 자가 성직자다. 성직자는 번제물 1순위의 양이다. 제사장은 제사에 쓸 제물용으로 양을 잡지만 그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져야 한다. 영적이며 실제적으로 번제물이 되지 않은 제사장이 양을 잡으면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가 되지 못한다. 이방종교에서 시행하는 다채로운 종교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 성직자가 먼저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예배는 사실상 죽은 예배로 간주된다.

구속공동체이자 언약공동체인 교회

천상에 기원을 둔 교회로서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지만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는 다양하다. 단일성과 다양성은 본질과 형태로 교회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성경 해석의 차이와 교리의 상이함에서 교단이 생겼고 교리에 대한 신학적 진단 결과 정통과 이단이 나뉘어졌다. 역사적으로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석연치 않았기에 무수한 정통 신앙인들이 이교도란 이름 아래 죽임을 당했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한 나무에는 많은 가지가 있지만 결국 같은 열매를 맺는다는 논리로 숱한 교단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되어도 교파의 난립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교회는 신약에서 구속공동체로서의 첫 모습을 보이지만 교회의 첫 원형은 에덴동산이다. 다시 노아의 방주, 성막과 광야의 회중, 성전 등으로 예표 되었다가 성령 강림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를 필두로 하여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구약의 상징적 교회와 신약의 실질적 교회는 연속성이 있다. 둘을 잇는 연결점이 다름 아닌 언약이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하나님은 한 민족을 선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주님은 언약의 실체로 오셨고 언약대로 죽으시고 언약대로 살아나셨다. 구속공동체는 곧 언약공동체다.

하나님 가슴 속에 있던 씨알, 교회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던 교회의 씨알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현현되었고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역사적 실존으로 태동되었다. 교회의 세부적 본질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음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세상의 그 어떤 세력으로 끊을 수 없는 결속력이다. 그들의 마음 바탕에는 하나님의 법이 새겨졌고 그들의 행동 강령은 성육신하신 말씀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다. 씨는 뿌려지고 싹이 나서 열매를 맺듯 교회에 위탁된 말씀은 전파되고 살아짐으로 증거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자율(自律)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법률 다시 말해서 신률(神律, divine rule)에 따라 다스려진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성령을 통한 다스림이다. 자발적인 섬김과 헌신을 기초석으로 하여 견고히 세워지는 교회에는 거룩함의 잣대에 따른 권면, 성령의 탄식에 따른 긍휼, 공의의 저울에 따른 권징이 있을 뿐이다. 긍휼의 관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으며, 권징의 측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in the presence of God) 있다. 시중에 널리 회자된 “코람 데오”(coram Deo)도 같은 맥락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복종한다. 이는 거룩이 온전히 다스려진 복종이며 성격상 자발적이다.

주권은 주님을 향해, 목적은 세상을 향해

교회의 주권은 교인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 세상에서는 주권재민이지만 교회에서는 주권재주(主權在主)다. 교회의 실체가 되는 천국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치 제도가 민주적(democratic)인 형태를 띠어도 주권적인 측면에서 교회는 신정적(theocratic)이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위만이 세상 만국을 뒤덮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을 향해 권리를 주장하거나 행사하려 하지 않는다. 교황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소위 교황의 절대 권력을 행사해왔지만 온당치 않다. 당연히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항상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한 존재임과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성육신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함이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다(본회퍼). 교회가 세상을 위하지 않고 인간을 위하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교회 안의 다양한 직제와 중요한 기능인 예배, 교육, 친교, 섬김 등은 모두 교회 밖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활력소다. 천국의 주막(도스토예프스키)으로서 교회는 곤한 영혼의 피난처요, 마을의 우물(교황 요한 바오로 23세)로서 교회는 삶의 나눔터다. 교회는 사회의 온도를 재는 온도기가 아니라 사회의 온도를 변화시키는 변도기다(마틴 루터 킹).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역공으로 세속화의 격랑에 휘말리기 쉽다. 교회는 순수한 만큼 쉬 더럽혀지며 즉시 회복하지 못하면 부패의 속도가 빨라 경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천상과 지상,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선 교회

교회가 위엣 것을 구하고 찾으면 천상의 영화로움에 젖지만 땅의 영광을 추구하면 지극한 아름다움에서 멀어진다. 하늘에 속한 천상적 본질과 땅에 존재하는 지상적 현상 사이에 교회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상보적인 두 요소가 서로를 지탱시켜주지 않으면 충돌을 일으키기 쉽고 이상적인 교회가 아닌 변종의 이상한 교회가 생겨난다. 교회의 천상적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유지되며, 지상적 현상은 지체간의 연락과 상합으로 강화된다. 교회의 원형은 하늘의 성소에 있다. 지상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었지만 천상 교회와의 통합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 속에서 구속공동체, 언약공동체, 믿음공동체로서의 진면목을 잘 가꿔야 한다. 시대와 시대를 잇는 연속성은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며 교파주의의 벽을 허물고 하나의 신앙고백을 채택할 수 있음은 교회의 유산인 성경, 구속의 복음, 선교 역사의 현실이다.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주님, 한 소망, 한 믿음, 한 세례를 외치는 것은 지상 교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하나 되라!’ 명하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함이다. 이것이 교회의 진면목이어야 한다. ‘물고 찢으면 피차 망한다!’고 외치면서도 감히 하나님의 교회 찢기를 밥 먹듯 하는 이들에게 임할 추상같은 단죄를 생각만 해도 심히 두렵다.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히 있지만 분열은 지양되어야 할 극약 처방이다.

모퉁잇돌-기초돌-머릿돌-쐐기돌-산돌인 교회

교회는 신앙고백의 터전 위에 세워졌다. 이 견고한 터는 하나님이 세우셨으며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았지만 모퉁이 돌(corner-stone)이 되셨다. 주님은 또한 기초석(chief-stone)이요 관석(冠石, cap-stone)이며 주석(柱石, key-stone)이시다.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산돌이시므로 그리스도께 구속함 받은 백성들 역시 산돌처럼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이 터 위에 건물을 세우고 이 밭에 씨를 뿌린다.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님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며 사도들은 이 밭에 물을 주고 정성스레 가꾼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밭과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 의인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 부르짖었다. 교회가 무너지면 의인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새로운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보다 이미 세운 교회를 무너지지 않게 보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너무 쉽게 세워지고 너무 허망하게 사라지는 교회 소식을 들을 때마다 슬픔보다 아픔을 느낀다. 교회를 사수해야 한다. 교회를 세울 때 주님께 물어보았다면 교회를 폐쇄할 때도 응당 주님께 여쭤야 한다. 개척예배를 드리듯 교회 폐쇄예배 또한 은혜 중에 드려져야 한다. 우리의 출입을 영원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종답게 그리스도인은 들고 남이 분명하고 열고 닫음 또한 확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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