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대강하면 쉽습니다. 법과 질서와 상식과 윤리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일이 쉬워집니다. 즉 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면 세상사의 어려움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면 나는 우선 편하지만 내가 편한 만큼 다른 사람이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면 일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직접 남의 돈을 훔치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라 공금을 횡령하는 것이나 유용하는 것과 부당하게 또는 불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나에게는 이익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은 자기만 도둑질을 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길 바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혼자 도둑이 되어야 수지맞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처럼 도둑이 되면 자기가 열심히 도적질 해봐야 다른 사람이 자기가 훔쳐다 놓은 것을 다시 훔쳐 갈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자기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독재의 가장 큰 매력도 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입니다. 모든 사람의 뜻을 묻고 종합하고 투표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듭니다. 반면에 독재는 시간과 비용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재는 매력적이고 종종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독재의 형태는 지도자나 통치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와 이익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기는 모든 개인의 행위도 독재의 해악 못지않습니다. 권력과 특권을 이용하여 법과 규범을 어기는 모든 행위는 그 해약이 크기 때문에 엄격한 가중처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단체에서도 정치권이나 사회단체 못지않게 불법과 편법이 자행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신앙생활만큼 다양한 수준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믿음이 있고 형편없는 믿음도 있습니다. 헛된 믿음도 있고 심지어 가짜 믿음도 있습니다. 별의별 수준과 형태의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는 사람들은 불법과 편법을 단순히 편리로만 생각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에는 어려움과 손해가 따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쉽게 신앙생활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해를 감수하고 바르게 잘 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가고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타협하고 양보하고 쉬운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지만 또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섭리와 계획과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피조물이지만 창조주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가 비록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구원자이신 주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다면 당연히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에만 참여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여 바른 신앙을 고백하기도 하였고 천국 열쇠를 받기도 하였으며 또한 사탄이란 책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이 있습니다. 두 번은 아가페로 물으셨고 한 번은 필로스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스로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은 며칠 전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죽을지언정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했었는데 그 다짐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아무리 단호하고 결연한 결심과 다짐과 맹세를 한다고 해도 배교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런 배신은 부부 간에도 부자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째 물으시자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 또 동일하게 세 번“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매번 그 표현이 약간씩 다르기는 합니다.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양을 먹여야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인다는 것은 교회를 돌보는 일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입니다. 목사에게는 그 일이 목회이고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는 특별히 사도들의 사역이 강조되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 할 때 사도로서의 사역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과 성경 계시를 완성하고 전하는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그런 사명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목회적 사명도 주어졌습니다. 사도들의 목회적 사명은 속 사도들에게 이어졌고, 다시 교부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런 전통은 지금까지 지속됩니다. 목회자들의 사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회적 사명 자들이 없이는 교회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회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역교회의 목회입니다. 바울의 편지들에 의하면 교회 지도자들은 개별 교회를 책임졌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사이비 이단에 대처하여 주님의 양들을 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권면하고, 범죄자를 꾸짖고, 싸우고 갈등하는 신자들을 화해시킵니다. 지역에 있는 개별 교회의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목회는 개별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노회가 있고 총회가 있는데, 이런 기관도 교회입니다. 개 교회의 목회는 이런 연합기관의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세우는 일을 이런 기관에서 합니다. 교리와 신학을 채택하는 일도 이런 기관에서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당시 세계공의회에서 중요한 교리를 결정하였습니다.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신학용어가 결정되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삼위일체론도 기독교의 정식 교리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우리가 지금 성경으로 사용하는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주님의 “내 양을 먹이라.”는 목회적 사명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이 없었다면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이러한 목회적 사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목회는 교인 수를 늘이는 일뿐 아니라 교회사적 이해와 개 교회가 곧 하나의 보편 교회라는 차원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명령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서 그 명령을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은 개인이나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개인이나 목회자가 능력이 있으면 주님의 명령을 잘 순종할 거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능력이 많아서 교회가 수적으로 부흥하게 되면 목회자가 주님의 명령에 더 잘 순종할 가능성보다 불순종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는 교인 천명이 넘는 교회에서는 주님이 주인으로 대접을 받으시기가 어려울 것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현대 목회의 어려움입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목회적 어려움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사도의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실제적으로 기독교는 헬라 철학보다 수준 낮은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단의 침투, 교우들 간의 분쟁과 박해까지 목회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로마는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회를 일벌백계로 다스렸는데 그 일벌백계의 대상이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를 요한복음 21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 하느냐?”는 질문과 “내 양을 치라.”는 명령을 하신 뒤에 베드로의 미래에 대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가 분명해 지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목회자요 지도자로 사는 것만이 아니라 고난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교까지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고난당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직접 목격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죽음의 길로 부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길, 즉 죽음의 길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길 가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축소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경건에 이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고행을 하라거나, 네 속에 있는 거룩성을 찾으라거나, 세상을 등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위로와 힐링과 기복이 중요합니다. 종교는 그런 것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 종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어려운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견해와 가치관과 꿈과 비전과 목표를 모두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이 주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일은 수입 얼마를 가난한 자들이나 복음 전파를 위해 일정액을 계획적으로 할애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익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재정이 허락되면 선한 일에 써야 합니다. 교회에 재물이 축적되면 안 됩니다. 이를테면 돈 많은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개인이 돈이 많은 것보다 교회가 돈이 많으면 더 쉽게 부패하게 됩니다. 돈 많은 교회가 그 돈을 다 흩어 선한 일에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개인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며 살기가 쉽지 않지만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희생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사이비 이단을 따르는 이들처럼 재산을 다 바치고 광신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따르는 것을 냉소적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치 세상을 바꾸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비전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라면 싸움이나 경쟁에서 손해 보는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떤 문제로 힘들어할 때 그의 책임을 내가 대신 질수만 있다면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모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죽음의 길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황상하 목사

『 그리스도인, 자기실현 지양하고 자기부인 지향해야 』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대화 중에, 이제 곧 인간의 성별도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때가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농담 비슷하게 하곤 하였습니다. 자신의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인 성과 상관없이 여자가 남자이고 싶으면 남자가 될 수 있고 남자가 여자이고 싶으면 여자가 될 수 있는 시대,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와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성을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시대와 사회, 이것이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성의 구별은 남자와 여자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성이 자유 선택의 대상이 된 지금 성의 종류는 50가지가 넘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한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여자인데 자신이 남자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남자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여자라고 여자 취급을 하면 성차별이나 불법이나 혐오범죄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남자인데도 본인이 여자라고 하면 그 사회가 그를 여자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여러 입장과 이해와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달리 볼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관점에 따라 아저씨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주의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인식과는 다른 관점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흰색을 검다고 하는 것도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사라지면 논리적으로 그런 주장이 가능하게 됩니다. 동성결혼이 정당하고 옳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 추구권을 방해하는 그 어떤 가치질서와 권위도 배격하는 현대인의 이런 시대적 가치관이 동성결혼을 합법화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절대적인 것과 전통적 가치질서를 허물기까지 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실현입니다. 거의 모든 현대인들은 자기실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실현(자아실현)은 인본주의 심리학의 용어로서 인간의 최상의 욕구에 해당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신자건 불신자건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실제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하느냐 하는 점에서 현대인들은 과거와는 너무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현대인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지만 인간의 행복 추구권은 절대화 시켜서 그것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제거하고 파괴해 버립니다. 상대주의가 그런 생각을 갖게 하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상대주의는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지만 상대주의만은 상대화 시키지 않고 절대화 시켜 놓았습니다. 상대주의가 정직하다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여자가 된 남자를 다른 사람이 여자로 보지 않고 남자로 보는 자유도 허용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하는 것을 성차별과 불법으로 제재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사상의 절대독재자로 군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부인을 지향하는 것이고 불신자들의 삶은 자기실현을 지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부인의 삶을 지향하는 것은 그것이 곧 참된 자기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역설입니다. “지양”이란 변증법 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서 어떤 사물에 관한 모순이나 대립을 부정하면서 한 층 더 높은 차원에서 그 대상을 긍정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높아지기 위한 목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져야 하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남을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나 남을 대접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고 대접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기부인을 지향하는 것으로 진정한 자기실현, 즉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사는 것은 자기부정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곧 구원 받은 자의 삶, 심리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기독교의 구원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자기실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어떤 것을 성취하므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자기실현이 행복의 절대조건이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 됨이 행복의 절대 조건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자기실현을 복음처럼 소중히 여기고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실현의 고상함(?)에 설득되거나 매료되어 있지만 자기실현의 구체적인 방법들이 얼마나 역겨운 것들이 많은지 깨닫지 못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미국 백인 동성애자 75%가 100명 이상의 섹스 파트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기조차 역겨운 것들이 소위 차별금지법이나 혐오금지법 같은 것에 페키지로 묶여 있습니다. 성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질서를 허무는 것은 자기실현의 현저한 왜곡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인의 자기실현의 방법들의 근저에는 기독교의 가치와 문화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주도했던 철학과 사상이 일차적 저항의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런 운동이 실질적으로 진보와 계몽과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까지 그런 운동의 사상적 기저가 되고 있는 반 기독교적 정신을 간파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한 철학과 사상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공격하였습니다. 칼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종교란 기독교를 지목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이 실패하자 마르크스를 추종하던 철학자들은 그 책임을 기독교 때문이라고 하며 더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마르크스 추종자이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던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는 1919년 헝가리 공산정부의 문화부 정치위원으로 있으면서 어린학생들에게 포르노 수준의 노골적인 성교육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성적 가치관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학부모들의 심한 반발로 실패하여 계속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시대정신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광주광역시, 전라북도가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공포하였는데, 그 안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성적 방종을 유도하는 조항들과 젠더, 감수성, 동성애, 페미니즘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멤버였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감성 헤게모니 선점을 주장하며 문화, 교육, 지식계로 침투하자고 주장했고, 미국 대학 강단을 좌편향으로 심각하게 기울게 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존재하는 모든 이론을 비판하라’고 선동하여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을 뒤흔들어 부정적 사고체계를 구축하고 좌익의 주장을 확산하기 위해 우익의 주장을 억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론화 하였습니다. 그들은 서구사회의 인식의 차별이 법제도의 차별보다 더 심각하다면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했습니다. 마르크스 진보 좌파 계열의 급진 페미니스트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서 兩性체계를 부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50개가 넘는 사회적 성 개념이 만들어지고 부자연스러운 성적 방종이 자기실현의 방편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추구되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 질서의 혼란은 전통적인 가정과 가족의 관계는 물론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예상을 불허하는 혼란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여간 불안하지 않습니다.

비평이론가인 더글라스 캘너(Douglas Kellner) UCLA 교수에 따르면, 게오르그 루카치, 안토니오 그람시,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 그리고 테오도어 아도르노에서 프레드릭 제임슨과 테리 이글턴에 이르기까지, 많은 20세기의 마르크스 이론가들이 마르크스 이론을 생산하여 대중 및 사회적 생활에 대한 영향력과 관련한 문화 형식의 분석에 이용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영향을 총칭하여 문화마르크스주의 라고 하는데, 이들은 가정, 사유재산, 종교, 국가를 파괴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상이 젠더 페미니즘의 성별갈등이나 성별해체와 맞물려 돌아가고, 이것을 반대하면 수구, 비도덕, 부패, 성차별, 가부장적으로 낙인찍는 여론전을 통해 의식을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문화마르크스주의는 가정을 파괴하고 가족을 해체하고 그 결과 출산은 줄어들어 인구가 감소하여 국가가 노령화 되어 경쟁력의 약화로 문명과 문화를 역행하여 필경은 온 국민이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는 자기실현과 반대되는 자기 부인을 강조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기부인은 자기실현을 구가하는 현대인에게 최대 장애물입니다. 그들은 “자기부인”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자기실현”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성경과 기독교를 파괴할 공격 대상으로 삼습니다.

문제는 자기실현적 가치관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을 자기실현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삼게 되면 성경의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하나님으로 바꾸게 됩니다. 절대주권으로 인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실현을 도와주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깁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보편적 질서와 가치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옳은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이고 선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할 때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나쁘게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엄격하게 말해서 이기주의자입니다. 오늘날은 철학과 사상과 가치와 시대정신이 이기주의를 합법화 하고 있습니다. 궤변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이기주의도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시대는 윤리 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인간 이하의 짓을 해도 존경 받고 인기를 누리고 노벨상까지 받습니다. 자기실현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복음을 자기실현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은 점점 혼란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형식이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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